🍎 阿闍(화장할사)梨判
(스승이 될 만큼 道德이 높은 規範師들의 모임, 卽 弟子의 行爲를 바르게 敎育할 만한 德이 높은 僧侶들의 모임을 말한다. 近來에는 秩序가 없이 여럿이 어지럽게 어울린다는 意味로 쓰이고 있다)
● 理判事判 野壇法席, 佛敎大辭典에.
阿闍梨는 印度의 小乘佛敎에서 學僧의 行動을 바로잡아 주는 師範으로,
敎育을 擔當할 만큼 德이 높은 스승, 또는 道가 높은 僧侶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말의 眞義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말의 뜻과는 相關없이 쓰고 있다.
위에 例示한 阿闍梨判이라는 말이 그렇다.
釋迦牟尼(本名은 고타마 싯다르타<悉達多喬達摩>)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많은 가섭(迦葉)과 그 三兄弟가 有力人士 2百20名을 데리고 王舍城의 釋迦牟尼에게 歸依했다. 僧團은 그로 因하여 勢力이 急激히 膨脹하였고 많은 指導者들이 大巨 모여들었다. 그러다보니 組織 內에 僧侶로서의 品位와, 衣, 食, 住의 法度가 統一되지 못해 紊亂했다. 甚至於는 돌봐줄 指導者가 없어서 看護도 받지 못한 채 숨지는 僧侶도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世尊은 當身을 代身해서 指導해 줄 和尙制度를 만들어 돌보게 했다.
“只今부터 和尙은 第子를 子息과 같이 사랑하고, 弟子는 和尙을 아버지같이 섬기도록 하라. 그렇게 서로 恭敬하고 보살피면 바른 法이 널리 퍼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和尙制度는 德이 높고 戒律에도 밝은 스님이 맡게 되자 敎團이 自然스럽게 發達하게 되었다.
이것이 四分律 33券에 記錄되어 있는 和尙의 誕生 由來다.
僧團의 規模가 繼續 커지면서 和尙이 보살피고 指導해야 할 弟子 數가 늘어나자 相對的으로 和尙의 數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새 和尙을 求하지 못하여 言行이 흐트러지고 삐뚤어지는 比丘가 늘어났다.
이에 釋迦牟尼는 僧團의 組織을 補完하기 爲하여 다시 새로운 制度를 만들었다.
“只今부터 阿闍梨 制度를 만드노니 阿闍梨는 弟子를 子息과 같이 생각하여 보살피고, 弟子는 阿闍梨를 아버지 같이 받들도록 하라.”
阿闍梨는 梵語로 敎授, 또는 軌範, 正行이란 뜻으로, 後學들에게 模範이 되며, 弟子들의 一擧手一投足을 指導 鞭撻해 주는 스승을 가리킨다.
阿闍梨는 크게 다섯 種類로 나뉜다.
(첫째) 出家阿闍梨는 出家를 決定해주는 큰스님을 말한다.
(둘째) 受戒阿闍梨는 戒를 주고 受戒節次를 周旋해 주는 스님을 말한다.
(셋째) 敎授阿闍梨는 威儀를 가르치고 警戒시켜 주는 스님을 말한다.
(넷째) 受經阿闍梨는 經典을 가르쳐 주고 그 뜻을 일깨워주는 스님을 말한다.
(다섯째) 依支阿闍梨는 工夫하고 參禪하는 스님의 別稱이다.
이와는 別途로 四分律行事鈔에는 受戒式에 갖추어야 할 10名 阿闍梨로, 三師七證이 있다. 三師는 戒를 주는 傳戒阿闍梨, 受戒節次를 主管하는 羯摩阿闍梨, 위의 作法을 가르쳐 주는 敎授阿闍梨를 말하고, 七證은 受戒를 證明해 줄 7名의 阿闍梨를 말한다.
이처럼 阿闍梨는 佛敎의 核心的인 役割을 맡은 中心人物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過去 儒崇 排佛思想의 影響으로 規範과 秩序를 지키지 않는 亂雜한 行動을 이르는 用語로 쓰여져 阿闍梨判이라함은 秩序 없이 우글거리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 我又栗木
('나도 또한 밤나무다.’ 라는 말로, 朝鮮時代의 學者 李珥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自身도 어떤 무리와 脈을 같이 한다는 同質性을 表明할 때 쓰인다)
●國朝人物考, 佛敎大辭典에.
朝鮮 宣祖 時代의 學者 李珥 (1546~1584)는 號가 栗谷이고, 兒名은 見(현)龍이며, 어머니는 申師任堂이다.
見龍은 어렸을 적에 江陵 烏竹軒에서 外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見龍이 書堂에서 돌아오자 外할머니가 물었다.
“見龍아, 저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
“石榴입니다. 제가 石榴에 對해서 詩를 한 首 지어 보겠습니다.”
見龍은 그 자리에서 詩를 지어 外할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紅皮囊裏 碎紅珠.”
“무슨 뜻인지 說明해 보아라!”
붉은 주머니에 붉은 구슬이 부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外孫子의 才致 넘치는 文章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外할머니는 한 스님으로부터 見龍이 貴人相이기는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갈 厄運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外할머니는 靑天霹靂과 같은 소리를 듣고 가슴을 鎭靜시킬 수가 없었다.
“그럼 , 見龍을 爲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밤나무 千 그루를 심으면 厄運도 막고, 훗날 나라를 爲해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外할머니는 사위 李元秀에게 이 말을 그대로 傳하고 덧붙여 말했다.
“여보게, 사위! 나는 이 말을 하늘이 내려준 啓示라고 생각하네. 밤나무를 많이 심으면 집안에도 有益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도 좋은 일이고, 見龍이를 爲하는 일도 된다고 하니 꼭 그리하게나.”
하여 스님의 말대로 밤나무를 심기로 하고 온 고을을 뒤졌으나 苗木을 五百 그루밖에 求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五百 그루는 알밤으로 심었다.
見龍의 아버지는 求해온 苗木과 씨밤을 坡州의 미추산에 精誠껏 심었다. 그리고 3年이 되자 見龍의 外할머니는 밤나무를 한 그루 한그루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異常했다. 分明 한 그루가 모자랐다.
“……九百九十八, 九百九十九.”
山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두 番 세 番 헤아려 봤지만 아무래도 한 그루가 모자랐다.
“九百九十八, 九百九十九…… 왜 한 그루가 안 보일까?”
그때였다.
“여기 있소. 나도 밤나무요(我又栗木)”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보니 잎 윗면을 보면 分明 밤나무인데 그 뒷면은 하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밤나무와는 다소 달랐지만 나무 스스로 自己도 밤나무라고 하니 그 뒤부터는 그 나무를 ‘나도 밤나무;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千 그루의 밤나무를 심어 厄運을 때우라는 스님과의 約束을 지켰다.
栗谷은 政治的으로나 思想的으로 우리나라의 큰 人物이다. 그의 行跡 中의 하나로 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아홉 차례나 壯元及第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別稱이다.
또 栗谷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嶺南學派에 이어 畿湖學派의 泰斗가 되었으며 退溪와 雙壁을 이룬 大學者였다.
그는 將次 있을 倭亂에 對備하여 十萬養兵說을 主張하는 等 洞察力을 지닌 큰 人物이었다.
🍎 峨嗟失期
(잘못을 깨달았을 때 無意識的으로 나오는 嘆息소리와 때를 놓쳤다는 말로, 豫言者 洪契寬에서 由來했다)
● 大東奇聞에.
朝鮮 第13代 明宗 때 洪契寬은 占卦로 앞날에 일어날 일을 鬼神같이 잘 맞혀서 有名했다.
그가 只今까지 남의 占卦만 뽑아 주다가 하루는 自己의 壽命에 對하여 占卦를 보니 某年 某月 某日 橫死할 運命이었다. 그래서 다시 살 수 있는 卜占을 찾아보니 바로 그 時刻에 龍床 밑에 숨어 있으면 죽음을 免할 수 있다는 占卦가 나왔다. 그는 自己 運命이 걸린 問題라 事實을 陛下께 알려 特別히 允許를 得하고 그날이 되자 龍床 밑에 숨어 있었다. 그때 마침 쥐 한 마리가 龍床 앞을 지나다가 잡혔다. 王은 洪契寬의 占術을 試驗해보고 싶어져서 龍床 밑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只今 이곳을 지나는 쥐가 있는데 모두 몇 마리인가?”
“예. 세 마리입니다.”
王은 쥐가 分明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잡혔는데 세 마리라고 하자 그가 占卦를 잘 맞히지도 못하면서 龍床 밑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이 無嚴하다고 생각하여 刑吏에게 그를 끌어내 死刑시키라고 했다.
“고얀놈. 王을 凌蔑해도 分數가 있지, 한 마리의 쥐가 지나갔는데 세 마리라고?”
洪契관은 死刑場이 있는 堂峴 南쪽 漢江 모래밭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抑鬱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刑吏에게 懇曲하게 付託했다.
“刑을 暫時만 더 遲延해 준다면 分明히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하오니 제발 時間을 끌어 延長해 주십시오.”
刑吏는 그의 말대로 相當한 時間을 遲延시켜 刑을 늦추어 주었다.
한便, 王은 그를 刑場으로 보내 놓고 그래도 未審쩍어 그 쥐의 뱃속을 갈라보게 했다. 果然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어 어미 쥐까지 合치면 세 마리가 맞았다. 王은 크게 感歎하고, 急히 刑을 中止시키라 했다. 內侍는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 堂峴 고개에 올라가 刑場을 내려다보니 막 刑을 執行하려고 칼을 번쩍 쳐드는 切迫한 瞬間이었다. 그래서 큰소리로 高喊을 치고 손을 흔들어 中止시키려 했다. 그러나 距離가 너무 멀어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만 死刑이 執行되고 말았다.
內侍가 大闕로 돌아와서 임금에게 事實을 告했다. 임금은 크게 後悔하여 峨嗟 (잘못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나오는 嘆息소리) 하고 嘆息했다. 이런 緣由로 堂峴을 峨嗟峴이라고 하였는데 只今의 峨嵯山邊이 그곳이다.
🍎 安家八孝
(安家, 卽 安氏 집안의 여덟 가지 孝道라는 말로, 孝子 安必伯의 孝行에서 由來했다. 孝行이 至極한 사람을 稱讚하는 意味로 쓰인다)
● 韓國孝行選集에.
安必伯의 本貫은 廣州이며, 全羅道 谷城에서 태어났다. 兒名은 師伯이요, 官職은 嘉善大夫에 이른다.
그는 하늘이 낸 孝子로서 그가 남긴 여덟 가지 孝行은 後世까지 傳해오고 있다.
첫 番째 孝行은 그의 아버지가 큰 腫氣를 앓고 있을 때 行해졌다.
온갖 藥을 다 써 봐도 效驗을 보지 못하자 必伯은 自己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 몸에 난 腫氣에 붙었다. 그러자 痼疾이었던 腫氣가 깨끗하게 나았다.
두 番째 孝行은 祈雨祭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한 것이었다. 必伯은 農事를 지어 어버이를 奉養해 왔는데,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었다. 논바닥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지고 벼이삭이 여물지 못한 채 그냥 말라갔다. 온 食口가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될 形便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沐浴齋戒하고 논 한가운데에 꿇어앉아 비가 내릴 때까지 祈雨祭를 올리기 始作했다. 그러자 정말 奇跡이 나타났다. 쨍쨍 빛나던 하늘에 瞥眼間 검은 구름이 낮게 일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런데 더욱 神奇한 일은 唯獨 必伯의 논 近處에만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는 農事를 잘 지어 父母를 便安히 모실 수 있었다.
세 番째 孝行은 父母가 좋아하는 飮食을 마련하여 드리는 일이었다. 必伯의 父母가 鰍魚湯을 매우 좋아해서 자주 市場에 나가 미꾸라지를 사다 奉養했다. 그는 父母를 奉養할 物件은 아무리 값이 비싸도 絶對 깎지 않고 값을 다 주고 사왔다.
미꾸라지를 파는 사람들은 그의 孝行을 뒤늦게 알고는 미꾸라지의 값을 꼭 받을 金額만 불러 必伯에게 尊敬의 뜻을 表했다.
다섯 番째 孝行은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爲해서 덫을 놓거나 사냥을 하여 매 끼니 거르지 않고 꿩고기를 올리는 것이었다.
여섯 番째 孝行은 이가 없는 父母를 爲해 감나무를 길렀다. 가을이면 감을 따서 일부는 軟柹를 만들고, 一部는 곶감으로 깎아 1年 내내 두고두고 드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감을 가리켜 安家孝柹, 곧 安씨네 집의 孝子감이라 불렀다.
일곱 番째 孝行은 남과 絶對로 다투지 않는 것이었다. 例컨대 밭이나 논의 境界를 가지고 問題가 생겨도 먼저 讓步하고 다투지 않아 父母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여덟 番째 孝行은 나들이를 할 때는 언제나 父母님께 行方을 告하는 것이었다.
그의 孝行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自然히 그를 따르고 尊敬하게 되었다.
🍎 安城製器
(安城에서 만든 그릇이라는 말로, 純粹한 우리말. ‘안성맞춤’을 成語한 것이다.
어떤 일이나 製品이 훌륭하게 잘 되었음을 뜻한다)
● 國史大辭典에.
安城은 古來로부터 鍮器를 만들어 오던 고장으로 安城鍮器하면 堅固하고 精巧하여 全國에서 歡迎받았다.
그로부터 物件이 堅固하거나 일의 機會인 事機가 確實한 일 또는 뜻하지 않은 일이 잘 들어맞을 때 安城맞춤이라고 했다.
安城 博物館에 所藏된 文獻에는 ‘安城맛침’, ‘安城맞춤’ ‘安城맞침’ 等으로 나와 있으나 只今은 ‘安城맞춤’으로 通用되고 있다.
安城에 傳해지는 俗謠는 安城 사람들의 氣質을 잘 表現해주고 있으며, 安城과 安城製器를 노랫말 속에 잘 담아내고 있다.
‘京畿 安城 큰아기 鍮器장사로 나간다. 한닙팔어 두닙팔어 파는 것이 자미라.
京畿 安城 아기 숟가락 장사로 나간다. 은동걸이 반수저(匙箸)에 깩기숫갈이 格이라.
京畿 安城 半福字 蓮葉周鉢은 媤집가는 새아씨의 膳物감이라
安城 가신 반저름(半油鞋)은 媤집가는 새아씨 발에 마침이다.
安城油紙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梳入)감에 마침이라.‘
安城이라는 地名은 高麗 初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傳한다. 高句麗 때는 奈兮忽, 新羅 때는 白城郡이라 불렀다. 그런데 1914年 陽城郡과 竹山郡을 統合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統合前에는 忠淸道에 所屬되어 있었으나 京畿道로 編入된 것이다.
安城은 慶尙道와 全羅道, 三南의 文物이 通過하는 便安한 삶의 터라는 말로 便安할 安字를 썼다. 오래 前부터 鍮器그릇(놋그릇)을 만들어 왔는데 鍮器그릇은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을 내다 파는 ‘장내기’와 注文을 받아 만드는 ‘맞춤’이 있었다. 그런데 맞춤 그릇이 유난히 튼튼하고 貌樣새가 뛰어나 富者들은 너도나도 맞춰서 썼다. 그러다보니 다른 그릇은 눈에 차지 않아 鍮器그릇은 꼭 安城 그릇만 찾게 되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대로 어떤 일이 제대로 잘 된 境遇 安城에서 맞춘 그릇처럼 마음에 쏙 든다는 뜻으로 ‘安城맞춤’이라 했다. 흔히 安城鍮器는 鑄物을 부어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붓백鍮器이고, 두드려서 만드는 것은 방짜鍮器다. 방짜鍮器는 만들기도 어렵고 費用이 많이 들어 只今은 無形文化財로만 남고 붓백鍮器만 만들어지고 있다.
一說에는 安城맞춤이 鍮器가 아닌 신발에서 由來했다고도 한다.
옛날 安城 地方에는 신발을 깁는 갖바치가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신발을 한곳에서 만들어 파는 게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注文받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自身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맞출 수 있었다. 그때부터 安城에서 맞춘 신발은 꼭 맞아 安城맞춤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 安坐作怠
(폭신하고 便安한 方席이 게으르게 만든다. 사람이 便安함을 좇기 始作하면 限이 없다는 말로, 朝鮮 英祖大王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 英祖實錄. 韓國人의 智慧에.
朝鮮 第21代 英祖 (1694~1776)는 朋黨의 弊害를 是正하기 爲해 蕩平策을 썼다. 또 在位 52年 동안 스스로 節制와 儉朴한 生活에 힘썼으며, 奢侈를 禁하고 農事를 奬勵하여 民生 安定을 圖謀하는 等 治績이 높았다. 그는 平素에 이렇게 말했다.
“臣下와 百姓이 儉素한 生活을 하도록 하기 爲해서 朕이 앞장서서 模範을 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居處하는 大闕의 房門이 찢어지면 손수 종이를 발랐다. 龍床은 緋緞 代身 무명천으로 만들게 했고, 버선도 신다가 헤지면 기워 신었다.
特히 ‘英祖의 方席’은 儉素의 象徵으로 百如 年 동안이나 戶曹에 保存되기도 했는데, 그에 對한 逸話가 재미있다.
戶曹判書는 王이 方席도 깔지 않고 맨바닥에 앉는 것이 悚懼스러워서 夫人에게 方席을 만들게 하여 進上했다. 다른 王 같으면 누에고치에서 뽑은 緋緞 솜을 겹겹으로 넣고, 色깔 고운 緋緞 천으로 만들었겠지만 儉素한 英祖는 그런 奢侈한 方席을 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무명천에 푸른 물을 들이고, 무명 솜을 넣어 만들었다.
그런데 英祖는 그 方席을 며칠 동안 使用하더니 다시 戶曹判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方席을 깔고 앉으니 몸은 便했소. 그러나 몸이 便하니 自然 게으르게 되어 쓰지 않기로 했소.”
모든 臣下들은 英祖의 儉素한 氣風을 따라 널리 實踐했다.
英祖는 實學의 學統을 樹立하고, 社會, 産業, 文化, 藝術 等 全 分野에 걸쳐 크게 復興시켰다. 그는 아들 思悼世子를 죽이는 等 不幸한 일도 저질렀지만 在位 52年 동안 많은 治績을 남겼다.
耆老科를 創設하여 60歲 以上의 선비와 武人들이 試驗을 보게 해 官吏로 登用하는가 하면 申聞鼓를 다시 設置하고, 稅制를 改編하는 等 制度 確立에도 힘썼다.
🍎 鴨子以隻
(오리가 외짝이다. 卽 오리의 짝數가 맞지 않다. 朝鮮 孝宗 때 豊山郡守의 寓話에서 由來했다. 論理에 맞지않는 愚昧한 行動을 比喩해서 쓴다)
● 古今笑叢 雜記에.
朝鮮 第17代 孝宗 때 多少 어수룩한 사람이 豊山郡守로 赴任했다.
그는 집에서 오리를 길렀는데 每日 꼭 두 마리씩 짝을 맞춰 세어서 確認했다.
하루는 그 집 下人이 오리 한 마리를 몰래 잡아먹었다.
그날 밤, 그는 늘 하던 대로 오리를 두 마리씩 세어보니 짝이 맞지 않고 한 마리가 남았다.
그는 下人 짓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성이 나서 그 下人을 매질하면서 말했다.
“이놈! 네가 敢히 오리를 훔쳐 먹다니……, 來日 아침까지 짝數를 채워놓지 않으면 捕盜廳으로 보낼 것이니라.”
郡守 딴에는 嚴하게 問責한다는 것이 겨우 짝數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그 종은 망설이지 않고 그날 밤 오리 한 마리를 더 잡아먹었다. 다음 날 郡守가 오리를 다시 두 마리씩 세어 보니 짝이 잘 맞았다. 그러자 그는 즐거워하면서 말했다.
“고얀놈! 용케 짝數를 채워놓았네, 내가 무섭긴 무서운 貌樣이지.”
🍎 野壇法席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野外의 자리. 近來에는 그 뜻이 變해서 떠들썩하게 시끄럽고, 右往左往하고 여럿이 모여서 다투고, 是非하는 模樣을 意味한다)
● 野壇法席 吏判事判에.
野壇이란 ‘野外에 세운 壇’ 이라는 뜻이고, 法席은 ‘佛法을 듣기 爲해 앉는 자리’ 라는 意味이다.
그런데 野壇아라는 이 말의 語彙的 뜻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野壇法席.
둘째는 惹端法席의 뜻이다.
첫 番째 野壇法席은 많은 사람들을 爲해 野外에 法壇을 마련하는 說法場을 말한다. 法堂이 비좁아 다 收容할 수 없을 때 野外에 壇床을 놓고 法席을 차려놓는 것을 이른다.
두 番째 惹端法席은 惹起鬧端法席의 준말이다.
흔히 ‘ 惹端法席을 떤다.’, ‘ 惹端法席이 났다.’, ‘ 惹端法席을 편다.’, ‘ 惹端法席을 친다.’ 等으로 表現한다.
惹起는 ‘어지러움을 일으킨다.’는 뜻이고 鬧端은 ‘시끄러움이 더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惹起鬧端은 어지러울 惹字에 일어날 起字다. 거기다가 시끄러울 鬧字를 더한 것이니, 매우 시끄럽다는 意味이다. 鬧字를 보면 싸울 鬥字 속에 저잣거리 市字가 들어 있어 시끄러움을 端的으로 說明해주고 있다. 惹起鬧端을 줄여서 ‘惹鬧’라고도 하는데, 트집을 잡아 함부로 떠들어댄다는 뜻이다. 요즘에 惹鬧를 부리는 사람을 特히 政治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자칫 野壇의 法席은 좋은 것이고, 惹端의 法席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是非의 分別은 眞理에 接近하는 基礎가 되기 때문에 惹端琺席도 그 端初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疑心을 疑端이라고 하여 參禪에서는 대단히 重要視 한다.
佛敎가 最初로 法席을 편 것은 紀原前 527年, 釋迦牟尼가 得道한 지 21日 後인 12月 29日, 鹿野苑에서 다섯 比丘에게 說法을 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馬鳴菩薩은 佛所行讚 第3券 轉法輪에서 野苑을 ‘수풀과 꽃과 열매가 우거지고 새들이 떼 지어 노래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閑寂하고 고요한 것을 즐기는 仙人들이 사는 곳’ 이라고 했는데, 그때 野壇法席에 參與한 사람은 橋陳如, 迦葉, 阿濕毘, 婆提, 바부(婆敷) 等의 다섯 比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숫자가 500比丘, 또 5,000比丘로 늘어났다. 따라서 그때마다 惹端法席을 편 것이다
🍎 野豬仲媒
(멧돼지가 仲媒를 했다는 말로, 成婚이 되려면 뜻하지 않게 自然스럽게 이루어진다는 意味로 쓰인다)
● 說話韓國歷史에.
高句麗 第9代 故國川王 (在位 179~197)이 죽자 王后 于氏는 媤同生 延優를 第10代 山上王 (在位 197~227)으로 擁位했다. 그러고는 王에게 王后를 맞이하지 못하게 했다. 兄이 죽으면 그 아내는 媤同生과 사는 蒙古 風俗에 따른 것이나, 高句麗 支配層에서는 兄死娶嫂制로 兄嫂를 아내로 맞는 事例가 있었다.
延優가 王位에 오르자 不滿을 품은 兄 發岐가 遼東太守 公孫度과 함께 3萬의 軍隊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山上王은 同生 계수(罽須)에게 이를 막게 했다.
山上王은 兄嫂 于氏가 國政 全般을 左之右之하는 바람에 王이면서도 늘 겉돌게 되어 不滿이 쌓여갔다.
山上王 7年(203年) 봄, 王은 山川에 祈禱를 드리면서 아들 낳기를 所願했는데 보름날 밤 꿈을 꾸었다.
“延優야, 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라.”
그러던 어느 날, 山上王이 말을 타고, 郊外로 사냥을 나갔다. 一行이 멧돼지를 發見하고 精神없이 쫓아가며 ‘저 멧돼지를 잡아라.’ 하고 소리치며 酒通村 마을 入口가지 쫓아갔으나 아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20如 歲 되어 보이는 處女가 나타나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 騷亂스러운가요?”
“묏돼지를 잡으려고 그러느니라.”
그러자 處女가 팔뚝을 걷어붙이더니 山돼지를 몰아 單番에 잡아놓고 말했다.
“아니. 武士들이 이까짓 돼지 한 마리 못 잡아 그렇게 쩔쩔매시다니, 쯧쯧…….”
侍從들이 묏돼지를 王 앞에 待令하고 山豚를 잡은 處女 이야기를 아뢰자 山上王은 自身의 身分을 밝히고 處女의 집을 찾았다. 處女의 집에서는 極盡히 禮를 갖추어 안으로 모시었다.
“山돼지를 맨손으로 잡다니 참으로 놀랍구나!”
王 앞에 서 있는 處女의 모습을 본 山上王은 한동안 女子를 가까이 하지 못했던 지라 갓 피어나는 處女를 보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날 밤, 處女는 王의 寢室로 案內되었다. 王의 視線을 온몸에 받자 處女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서 衾枕을 펴도록 하여라.”
“陛下! 後日을 期約해 주시옵소서!”
“後日을 記憶하라니? 무슨 말이냐?”
“少女가 陛下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어찌하시겠는지요?”
“허허! 그리되면 宮으로 데려 갈 테니 걱정 말아라.”
王의 말이 떨어지자 處女는 王의 約束을 받아들여 衾枕을 펴고 恍惚한 時間을 보냈다.
이 消息을 傳해들은 王后 于氏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서릿발 같은 怒氣로 씩씩거리며 그 女를 죽이라고 心腹을 보냈다.
處女는 이 消息을 듣고 男裝으로 變裝하여 逃亡가려 했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處女가 그들을 向해 堂堂하게 말했다.
“只今 當身들이 나를 害치려고 하는데 都大體 누구의 命令이냐?”
“王后의 命令이오.”
“大王의 命令이라면 받겠지만 王后의 命令이라면 못 받겠다. 只今 내 몸에는 大王의 分身이 들어있다. 내 한 生命은 犧牲되어도 相關없지만 王子까지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서 물러가서 그렇게 告하여라!”
心腹들이 그 消息을 傳하자 王后도 어쩌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山上王은 그 消息을 듣고 卽時 酒通村으로 찾아갔다.
“그래, 홀몸이 아니라고? 그럼 그 子息이 누구의 子息인고?”
“少女는 오직 陛下를 모신 일밖에 없습니다.”
그女의 말을 들은 山上王은 깊은 愛情을 느껴 이름을 물었다.
“后女라고 합니다.”
“后女라니, 그 뜻이 무엇이냐?”
“惶恐하오나 저의 어머니가 저를 孕胎하고 占을 쳤는데 王子를 낳을 거라는 占卦를 받아 그렇게 지었다 하옵니다.”
“오, 네가 일찍이 王后로 점지 받았다는 말 아니냐!”
王은 그女의 말을 듣자 꿈을 생각하면서 後嗣에 安堵의 웃음을 지었다.
그 後 그 女는 玉童子를 낳으니, 이름을 멧돼지를 잡다가 얻은 아들이라는 뜻으로 郊彘라 했다. 나중에 第11代 東川王이 되었다.
🍎 野合公主
(正式으로 婚姻하지 않고 無端히 夫婦가 된 公主라는 말. 崎嶇한 運命이나 複雜한 事緣이 있는 夫婦를 뜻 한다)
● 國朝榜目에
朝鮮 第7代 世祖(1417~1468)의 셋째 公主는 어려서부터 어질고 德性스러웠다. 그런데 아버지 世祖가 端宗(1441~1457)을 廢位시키고 權座에 오르면서 左議政 金宗瑞를 비롯한 皇甫仁 等 많은 忠臣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는 밤낮으로 슬퍼하며 밥도 먹지 않았다. 더욱이 端宗의 어머니 무덤, 昭陵이 파헤쳐질 때에는 눈물로 懇曲하게 挽留하니, 世祖는 비록 딸이지만 豫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不安해했다.
그러자 公主의 어머니 貞喜大妃가 乳母로 하여금 公主를 데리고 멀리 避身케 하고, 世祖에게는 公主가 갑작스런 病으로 죽었다고 속였다.
公主와 乳母는 定處 없이 헤매다가 忠淸도 報恩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몸이 지쳐서 길가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한 總角이 지나다가 물었다.
“두 분은 시골 사람 같지 않은데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네, 그럴 事定이 있어 漢陽에서 이곳까지 왔으나 딱히 갈 곳을 定하지 못해 躊躇하고 있습니다. 한데 總角도 보아하니 例事 사람이 아닌 듯한데 무슨 事緣이 있는 것 아니오?”
“네, 저도 그럴 만한 事緣이 있어 홀로 살고 있습니다.”
公主가 總角을 살펴보니 衣服은 비록 襤褸하지만 男子답고 凜凜한 데가 있어 臨時로 함께 居處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情이 들어 夫婦가 되었고, 總角은 비로소 公主에게 그곳에 내려온 까닭을 물었다. 公主가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자 乳母가 自初之終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總角은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事實은 내가 金宗瑞어른의 孫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禍를 當하시던 날, 나만 홀로 避하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게 遇然치 않게 野合한 두 사람은 서로 慰勞하며 살았다.
한便, 世祖는 末年이 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절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佛供을 드렸다. 그 行次가 俗離山으로 가는 中에 公主가 사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놀고 있는 公主의 아들을 보게 되었다. 世祖는 그 아이의 容貌가 自身을 많이 닮은 것을 異常히 여기고, 아이를 따라 집에까지 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딸을 만나게 되었다. 公主는 金宗瑞의 孫子와 살게 된 事緣을 이야기했다.
世祖는 自己의 잘못을 뉘우치며 함께 漢陽으로 올라가 살자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公主로부터 그 이야기를 傳해들은 金宗瑞의 孫子는 公主의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이 秘史는 高宗 때 吏曹判書를 지낸 朴承輝(1802~1864)에 依해서 傳해졌다. 그때부터 崎嶇한 運命이거나, 複雜한 事緣이 있는 夫婦를 比喩하여 野合公主라 했다.
🍎 於異阿異
(‘어’ 다르고 ‘아’ 다르다. 卽 點 하나 差異에 依해 소리가 달라지듯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뜻의 말이라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을 이른다)
● 韓國人의 智慧, 太平閒話에.
朴相吉이라는 푸줏간 主人에게 金善基와 朴太煥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다. 먼저 金善基가 말했다.
“얘! 相吉아, 고기 한 斤 썰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對答 소리에는 어디인지 모르게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러나 朴太煥은 相對가 賤民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기에 높여서 말했다.
“朴書房, 여기 고기 한 斤 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기를 쓱싹 썰어 주었다. 먼저 고기를 받아 든 金善基가 보니까 自己 것이 朴太煥의 것보다 折半도 안 되는 지라 火가 나서 물었다.
“이놈아, 같은 한 斤인데 어찌 내 것은 이리 적으냐?”
그러자 푸줏간 主人이 볼멘소리로 쏘아붙였다.
“손님 고기는 相吉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朴 書房이 잘랐기 때문이죠. 世上에 하고많은 말이지만 그 나이가 되시도록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於異阿異’는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을 音에 맞추어 漢譯한 것이다.
🍎 與民同樂
(百姓과 苦樂을 같이 한다는 말. 임금이 百姓을 사랑하고, 그 臣下가 忠誠으로 나라를 받들어 渾然一體한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 券42에.
三國時代 때 高句麗, 新羅, 百濟 三國이 서로 먼저 漢江流域을 占領하여 ‘統一의 터전’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475年에는 高句麗의 第20代 長壽王이 南下政策을 펴 占領했고, 553年에는 新羅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高句麗와 百濟가 同盟하여 新羅를 牽制함으로써 新羅는 孤立되었다.
이에 新羅가 唐나라와 提携를 謀索하자 唐나라는 그 機會를 利用하여 韓半島를 倂呑하려는 野慾을 품고 羅.唐 聯合軍을 結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唐나라에서는 適當히 關餘하다가 때가 오면 實利를 차지하겠다는 心算이었다. 쉬고 있다가 相對가 지치면 맞아 싸운다는 兵法 以逸待勞의 計略으로 接近했던 것이다. 때문에 唐은 兵力과 武器를 一部만 가져오고 軍糧과 被服은 新羅가 負擔하게 했다. 따라서 新羅의 負擔은 二重 三重으로 加重되었다. 그 後 唐나라는 百濟와 高句麗를 平定하게 되자 露骨的으로 凶計를 드러내 百濟 땅에는 五都督府를 두고, 高句麗 땅에는 九都督府를 두어 倂呑政策을 露骨化했다. 唐나라의 이러한 行爲는 背信行爲임에 分明했고, 羅.唐 聯合의 協定을 크게 違反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唐나라는 百濟의 泗泌城에 據點을 만들고 新羅를 侵犯하려는 陰謀까지 꾸미자 新羅에서는 이를 알고 對策 會議를 열었다. 多美公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우리 新羅의 百姓을 百濟 사람으로 僞裝시켜 反亂을 꾀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나라 軍士들이 이를 制壓하려 나올 것입니다. 그때 맞서 싸운다면 成功할 수 있습니다.”
金庾信도 이에 積極的으로 贊成했다. 그러자 王이 말했다.
“唐軍은 우리를 爲하여 百濟軍을 擊滅시켰는데 이제 와서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는가?”
이에 金庾信이 나서서 말했다.
“개도 主人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法입니다. 하물며 나라의 存立이 頃刻에 달렸는데 어찌 自救策을 講究하지 않으오리까? 바라옵건대 이를 許諾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新羅는 國防을 튼튼하게 再整備했다.
한便, 唐나라 將帥 蘇定方은 新羅의 防備가 튼튼해지자 百濟의 官吏93名과 軍士 2萬 名을 사로잡아 돌아가니, 唐 高宗이 말했다.
“어찌하여 新羅를 征伐하지 아니했는가?”
蘇定方이 말했다.
“新羅는 그 王이 어질어 百姓을 사랑하고, 그 臣下는 忠誠으로써 나라를 받들고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征伐하기가 어려웠나이다.”
라고 아뢰었다.
🍎 汝是汝是
(너의 말이 옳고, 너의 말도 옳다. 卽 사람의 일은 두루두루 따지면 모두 나름대로의 妥當性이 있다는 뜻이다)
● 韓國人物誌
黃喜(1363~1452)는 高麗 末에서 朝鮮 初期 때 사람으로 本貫은 長水이고, 號는 庬村이다. 그는 各 部署의 首長을 거쳐 領議政을 18年間이나 歷任하면서 많은 制度를 改善한 名宰相이었다.
그는 高麗가 亡하자 杜門洞에 들어가 隱居했으나 太祖의 懇請으로 1394年 成均館 學官과 文藝春秋官, 京畿 都事를 맡아보았다.
領議政이 되어서는 禮法을 改正하여 賤妾 所生의 賤役을 免除하는 等 훌륭한 業績을 많이 남겼다.
그는 平素 威嚴이 있으면서도 人品이 圓滿하고 淸廉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날카로운 눈썹, 그리고 鬚髥이 잘 어울렸다. 마음이 너그러워 집에서 일하는 下人들도 百姓이니 사람으로서의 待遇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얽힌 逸話가 있다.
어느 날 그가 便紙를 한 통 써 두었는데 下人의 아이가 그 위에다 오줌을 누워버렸다. 그러나 그는 火를 내지 않고, 不問에 부쳤다. 또 한 番은 그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린 下人 아이가 흙 묻은 맨발로 들어와 술按酒를 맨손으로 집어먹다가 그의 발을 밟았다.
여늬 사람 같으면 불號令이 떨어질 만하건만 火를 내지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女子 下人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찾아와서 相對方이 이러이러하게 잘못을 하고도 덤빈다고 하소연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가 말했다.
“그래, 네가 옳다.”
그러자 이番에는 같이 싸웠던 下人이 달려와서 自己가 옳다고 主張했다. 이에 黃喜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도 옳다.”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런 判決이 어디 있습니까? 너는 그러하고 너는 이러하니 네가 옳고 네가 잘못했다라고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黃喜가 말했다.
“當身 말도 옳소.”
그는 每事를 汝是汝是로 一貫하니 主觀이 分明치 않은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그의 생각이 너그럽고, 人格이 圓滿하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다.
🍎 年高位下
(나이는 더 많으나 職位가 아래다)
● 高麗史에.
高麗 末 文人 安宗源(1325~1394. 本貫 順興. 字 嗣淸. 號 雙淸堂. 諡號 文簡公)은 科擧에 及第하여 忠穆王 때 史翰에 任命 되었다가 任期가 차 昇進하여 轉補 할 즈음 同僚 沈東老가 나이도 많은데 職位가 낮아 그 자리를 讓步하였다. 그의 父親 安軸이 이 消息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讓步는 德의 最高로 남을 配慮하고 讓步 할 줄 안다면 누가 너를 저버리겠는가? 將次 家門이 크게 昌盛 할 것이다."
周圍의 信望이 두터워 더욱 隆盛하였다.
🍎 鷰頷鷹眼
(제비의 턱과 매의 눈이란 말로, 將次 큰 人物이 될 非凡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高句麗의 惠諒法師가 新羅의 居柒夫의 처음 印象을 보고 將次 將軍이 될 人物임을 알아본 데서 由來되었다)
● 三國史記 列傳44券 居柒夫>
新羅時代 大阿湌 居柒夫(荒宗이라고도 함)는 奈勿王의 5代孫으로 姓은 金氏이며, 할아버지는 角干 仍宿이며, 아버지는 伊湌 物力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遠大한 뜻이 있어 스님이 되어 高句麗로 들어갔다. 그리고 法師 惠諒에게로 가서 法經 講論을 들었다.
그를 본 惠諒法師가 물었다.
“沙彌는 어디에서 왔느냐?”
“예, 新羅에서 왔습니다.”
“네 容貌를 보니 凡常치 않구나, 或是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
“아니옵니다. 저는 新羅의 邊方에서 出生하였으므로 아직 佛敎의 眞理를 듣지 못했습니다. 스승님께 참된 道理를 배우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니 拒絶하지 마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오늘 너를 보니 普通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가 작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能力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가 네가 新羅에서 온 것을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物議를 일으키지 말고 어서 돌아가거라.”
이 말을 듣고 居柒夫가 돌아가려고 하자 法師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너의 印象이 제비턱(鷰頷)에 매의 눈(鷹眼)이라, 將來에 반드시 將帥가 될 것이다. 將次 軍士를 거느리고 高句麗로 쳐들어오게 되면 그때 나를 해치지 말아라.”
“네, 萬一 스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新羅로 돌아와 眞興王 6年, 545年에 王命을 받들어 國史를 編纂했으며, 그 功勞로 波珍湌으로 昇進했다. 眞興王 12年, 王은 居柒夫 및 大角湌, 仇珍, 角粲, 比台, 잡찬(迊湌), 耽知 等 여덟 將軍에게 命하여 百濟와 聯合하여 高句麗를 侵攻하게 했다.
그리하여 百濟의 軍士가 먼저 平壤에 進入하자 居柒夫는 竹領 밖 高峴 안의 10個 郡을 빼앗았다. 그때 惠諒法師와 길 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居柒夫는 卽刻 말에서 내려 軍禮로써 깎듯이 절하고 그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옛날 留學하던 때 法師의 恩惠를 입어 生命을 保全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무엇으로 報答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法師가 말했다.
“只今 우리나라가 어지러워 滅亡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으니 나는 그대의 나라로 가서 살기를 願한다.”
그리하여 居柒夫는 惠諒法師를 모시고 돌아와 王에게 事實을 아뢰니, 王은 그를 僧統으로 삼아 百座講會와 佛敎의 儀式인 八關會를 開催하게 했다.
居柒夫는 眞智王 元年(576年)에 上大等이 되어 나라의 重要한 軍事, 政治 任務를 遂行하다가 78歲에 別世했다.
🍎 裂起之勇
(裂起의 勇氣라는 말로, 남들이 어려워 忌避하는 일을 自願해서 勇氣있게 해내는 것을 意味한다)
● 三國史記 列傳 第7에.
裂起는 新羅 第30代 文武王 (在位661~681) 때의 武官이었다.
文武王 元年, 唐나라의 蘇定方은 高句麗 征伐에 나서 平壤을 包圍했다. 그러나 軍糧이 떨어지자 含資道 摠官 劉德敏을 시켜 新羅의 國王에게 支援을 要請했다.
이에 文武王은 大角干 金庾信에게 命해 쌀 4千 석과 벼 2萬 2250석을 輸送하게 했다. 그 行列이 獐塞(遂安)에 當到했는데, 눈바람이 휘날리고 날씨가 몹씨 추워 말과 兵士들이 많이 얼어 죽는 바람에 調達되지 못했다. 그러자 이를 안 高句麗 軍士들이 길목을 막고 攻擊해왔다. 唐慌한 金庾信은 멀리 떨어진 唐나라 指揮官에게 書札을 보내려 했으나 距離가 멀어 到底히 보낼 수가 없었다. 이때 步騎監으로 있던 裂起가 나서며 말했다.
“將軍님! 제가 直接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軍師 仇近 等 軍士 15名과 함께 말을 달리니, 高句麗 軍士들이 그 勇猛에 놀라 敢히 막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이틀 만에 蘇定方에게 命을 傳達하니, 蘇定方은 크게 기뻐하며 答狀을 써주었다. 裂起가 다시 이틀 만에 돌아오니, 庾信은 그의 勇猛을 嘉尙히 여겨 王에게 上申했다.
“裂起와 仇近은 天下의 勇士입니다. 臣이 臨時로 級湌 位를 주었으나 功勞에 맞지 않으니, 沙湌으로 位를 높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王이 말했다.
“ 沙湌이면 좀 過하지 않은가?”
이에 庾信은 두 番 절하며 말했다.
“벼슬과 祿俸은 功이 있는 者에게 주는 것이 當然하온데 어찌 過하다 하십니까?”
그제야 王이 欣快히 許諾했다.
🍎 禮成江曲
(禮成江의 노래라는 말로, 宋나라 장사꾼에게 속아 아내를 빼앗기게 되자 夫婦가 離別을 하며 불렀던 슬픈 노래를 말한다)
● 增補文獻備考에.
高麗는 契丹의 1次, 2次, 3次에 걸친 侵犯으로 便安한 날이 없었다. 1018年, 契丹의 蕭排押이 10萬 大軍을 이끌고 와서 朝貢을 바칠 것을 要求했다. 高麗가 이를 拒絶하고 國交를 斷絶하자 武力으로 侵犯해 왔다. 그러자 姜邯贊은 上元帥가 되어 20萬 軍士로 興化鎭에서 接戰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에 朝廷에서는 祝賀宴으로 燃燈會를 열었다. 그리고 11月에는 30年 만에 八關會를 다시 가졌다. 八關會는 始祖廟에 祭祀를 모시는 風俗으로 술과 茶菓를 베풀며 歌舞 等으로 天神을 慰勞하고 國家와 王室의 太平을 祈願하는 行事였다.
그 무렵 高麗는 宋나라와 國交를 맺고 있었으나 契丹의 干涉이 甚해 宋나라와 交流를 할 때에는 契丹의 눈을 避하여 明州船路를 擇하였다.
明州船路는 禮成港 碧瀾渡에서 出港하여 黃海 沿岸을 거쳐 全羅道의 黑山島를 지나 다시 西南쪽 큰 바다로 빠져 나가는 港路였다.
高麗의 貿易은 王族과 貴族들이 하는 官營貿易과 一般 장사치들의 私貿易으로 나뉘었다. 高麗와 宋나라 사이에는 使臣이 오가는 배와, 장사치들의 商船의 往來가 끊임없었다. 그리고 宋나라를 비롯하여 契丹, 女眞, 日本 等의 外國 장사치들이 利用하는 禮成江 河口에는 客館과 茶館, 妓樓, 술집 等이 櫛比하게 있었다.
여기에 宋나라 장사치에게 속아서 마누라를 빼앗길 뻔한 한 사내의 이야기가 傳해지고 있다.
禮成江 河口에 한 젊은 夫婦가 琴瑟 좋게 살았다. 男便은 뱃사람이었고, 아내는 港口에 드나드는 뱃사람과 장사치를 相對로 飮食을 팔았다. 그런데 그 夫人의 飮食솜씨가 뛰어난데다가 보기 드문 美人이었다.
하루는 宋나라에서 온 賀頭綱이란 장사치가 高麗 장사치들과 함께 찾아왔다가 그 夫人을 보고는 美貌에 단박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배에 싣고 온 物品들을 팔고 高麗의 物建으로 바꿔 실을 때까지 그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賀頭綱은 배에 있는 時間은 밤에 잘 때뿐이고, 하루의 大部分을 밥집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賀頭綱이 夫人에게 말했다.
“내가 여러 날 이곳에 와 있었는데 主人아저씨를 좀 만나고 싶소이다.”
그리하여 主人과 마주앉은 賀頭綱이 말했다.
“主人丈! 오늘은 비도 오고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 板 둡시다.”
“잘 둘 줄 모르는데요.”
主人이 한 발 뒤로 빼자 賀頭綱이 말했다.
“나두 뭐 別로 잘 두지는 못합니다.”
賀頭綱이 몇 點을 놓아보니 主人의 바둑 實力이 自己보다 한 首 아래로 보였다. 그러나 賀頭綱은 일부러 져주기도 하고 適當히 이기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主人丈! 바둑을 잘 두시는군요? 그런데 그냥 두는 것은 심심하니 우리 내기바둑을 둡시다.”
“무엇을 걸구요?”
“緋緞을 겁시다.”
이렇게 하여 내기 바둑을 두었는데 두는 대로 賀頭綱이 져서 배에 있던 緋緞이 몽땅 밥집에 쌓이게 되었다.
“하, 큰일났네. 主人丈! 난 이젠 緋緞이 한 疋도 없는데 뭘 걸었으면 좋겠소?”
“배가 있지 않소? 배를 거시구려.”
“그렇지만 主人丈이 가진 緋緞의 몇 百 곱절을 줘도 내 배를 살 수 없는 건데…….”
“그러면 내 집과 緋緞을 함께 걸리다. 그래도 안 되겠소?”
賀頭綱은 고개를 左右로 저었다.
“그것으로는 모자라고, 걸만한 게 꼭 하나 있기는 하오만…….”
“그게 뭐요?”
‘나는 緋緞을 다 주고, 이제 한 척 남은 배마져 걸었으니 主人丈은 夫人을 거시오, 내가 지면 나는 빈 몸으로 宋나라로 돌아가고, 當身이 지면 내가 主人丈의 夫人을 데리고 가겠소, 어떻소?“
主人은 暫時 생각해 보았다.
‘지면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게 되겠지만 이기기만 하면 큰 배의 船主가 되어 내기에서 딴 緋緞을 가지고 貿易을 하면 임금님 부럽지 않은 큰 富者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慾心에 눈이 먼 主人은 豪氣롭게 말했다.
“좋소! 내가 지면 主人丈 배의 砂工 노릇이라도 하겠으니 좀 써주시구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내기 바둑이 벌어졌다. 그러나 바둑은 賀頭綱의 勝利로 끝나고 말았다.
“主人丈! 오래간만에 내가 이겼소. 이番 밀물에 배가 떠야 되니까 約束대로 夫人을 불러 주시오.”
그제야 精神이 번쩍 든 밥집 主人은 눈앞이 깜깜했다.
'아뿔사! 내가 속았구나! 이놈이 내 아내를 빼앗아 가려고 일부러 져준 게 틀림없어, 바보! 내가 바보지, 結局 緋緞을 받고 사랑하는 아내를 판 꼴이잖아!'
아름다운 아내와 結婚한 後 只今까지 싸움 한 番 안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아내를, 그것도 外國 사람의 집으로 바다를 건너 멀리 보내게 된 것이 眞正 슬펐다.
緋緞을 도로 가져가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눈물로 事情하였으나 賀頭綱은 듣지 않았다.
“무슨 소리요? 어서 夫人을 불러주시오. 밀물 時間이 얼마 남지 않았소.”
主人이 할 수 없이 아내를 데리고 나오자 賀頭綱이 말했다.
“夫人! 이것도 因緣인가 보오. 宋나라는 매우 豪華스러운 곳이오. 이 좁은 漁村에서 苦生을 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宋나라로 가서 幸福하게 삽시다.”
夫人은 屠殺場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음에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겨 배에 올랐다.
밥집 主人은 미친 듯이 따라가며 소리쳤다.
“이 도둑놈아! 緋緞을 도로 가져가고 내 아내를 돌려다오.”
그러나 한 番 떠나간 배가 다시 뱃머리를 돌릴 리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밥집 主人은 水平線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지는 배를 바라보며 목메어 禮成江曲을 불렸다.
내가 物慾에 눈이 어두워 當身을 팔았소.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가면 언제 올 거요?
목메어 울어봐도 임이 탄 배는 아니 오고
禮成江 碧瀾渡엔 갈매기만 넘나드네.
男便이 가슴을 치며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의 아내 亦是 배 안에서 男便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怪異한 일이 생겼다.
배가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에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賀頭綱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배 안에 있는 占쟁이를 急히 불러 무슨 變故인지 占을 치게 했다. 占쟁이가 말했다.
“배 안에 貞節을 生命처럼 지키는 夫人을 監禁해 두었기 때문이오. 그 夫人을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큰 火를 입을 것이오.”
“貞節을 지키는 夫人이라고?, 밥집의 그 夫人 말인가?”
“맞소. 틀림없이 그 夫人 때문이오! 그 夫人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냥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물鬼神이 될 것이오.”
“할 수 없지. 뱃머리를 돌려라.”
그러자 神奇하게도 맴돌던 물이 潛潛해지고 順風이 불어와서 배가 翣時間에 禮成江 河口에 닿았다.
賀頭綱이 夫人에게 말했다.
“夫人! 龍王도 夫人의 貞節에 感服한 것 같소. 못된 나를 容恕하시오. 當身을 기다리고 있는 男便에게로 가시오.”
밥집 夫人은 뜻밖에 되돌아온 아내를 보자 容恕를 빌었다.
“여보! 내가 物慾에 눈이 멀어 當身을 빼앗길 뻔했소. 容恕하구려!”
永永 헤어지는 줄 알았던 夫人도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임 向한 一片丹心 이내 貞節 누가 꺾으리.
永永 離別인가 하였는데 다시 만났소.
龍王님이 길을 막아 우리 다시 만났네.
禮成江 하구의 當身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으리.
以後 男便이 부른 노래는 禮成江曲 前篇, 아내가 부른 노래는 後篇이라고 하였으나 노래는 傳하지 않고 高麗歌謠로 이야기만 傳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름에 미친 사람을 일러 ‘禮成江曲의 主人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禮以胎敎
(禮로써 胎敎를 하다. 賢淑한 夫人이 姙娠 中에 例에 따라서 胎敎를 하여 大學者로 키운 故事에서 由來했다)
● 三國史記 列傳 第5에.
栗谷 李珥의 어머니 申師任堂 (1504~1551)은 朝鮮 第13代 明宗 때 江原道 江陵에서 申命和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本貫은 平山이며, 監察 李元秀와 열아홉 살에 結婚하여 四男四女를 두었고, 師任堂은 그 女의 號이다. 그 女는 孝誠이 至極하고, 人品이 高潔한 賢母養妻였다.
어려서부터 經文, 글씨, 그림, 文章, 針工(바느질, 刺繡) 等을 고루 工夫하여 各 分野에서 一家를 이루었다.
그 女가 일곱 살, 世宗 때의 有名한 畵家 安堅이 그린 夢遊桃源圖와 赤壁圖를 보고 크게 影響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始作했다. 그 女의 그림은 女性 特有의 纖細함과 精描함으로 葡萄, 풀 , 벌레 等을 잘 그려 새로운 畵風을 이루었다.
또 그의 思親이라는 詩에는 어린 時節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情이 잘 드러나 있다.
千 里 먼 故鄕 萬疊山 저 너머로 (千里家山萬疊峰)
뵈오러 가고파라 꿈속에서일망정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 가에 외로이 떠오른 둥근 달 (寒松亭畔雙輪月)
鏡浦臺 앞에는 몰아치는 거센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只今도 모래톱엔 갈매기 놀겠지 (沙上白鷗恒聚散)
바다 위엔 고깃배들 물결 따라 오고가는데 (波頭漁艇每西東)
언제나 故鄕길 다시 밟아보려나 (何時重踏臨瀛路)
色동옷 입고 엄마 곁에서 바느질하던 때가 그립구나.(綵舞斑衣膝下縫)
다음은 申師任堂이 38歲에 지은 詩로, 어린 栗谷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江陵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읊은 것이다.
늙으신 어머님을 臨瀛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떠나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北村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만 저문 靑山을 날아 내리네 (白雲飛下暮山靑)
白髮의 어머니를 鶴의 머리에 比喩하여 홀로 계시게 한 自身의 가슴속의 뜨거운 情을 엿볼 수 있게 하는 哀絶한 글이다.
申師任堂은 媤宅에 돌아와서도 故鄕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 생각을 暫時도 놓지 못했다. 밤이면 어머니 계신 곳을 向하여 눈물을 짓는가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子女 敎育에는 온갖 精誠을 다 기울였으며 詩文과 書畵, 刺繡에 힘썼다.
그 女가 李元秀에게 出家하여 江陵 烏竹軒에서 아들아이를 姙娠 했을 때, 검은 龍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出産했으므로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현용(見龍)이라고 했다.
그 女는 姙娠했을 때 胎敎로 말은 고운 말로, 行動은 眞重하게, 邪惡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고, 恒常 마음은 穩和하게, 몸가짐은 端正히 갖는데 努力했다.
栗谷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胎內 敎育과 詩文을 지으시는 態度와 꿋꿋하게 사시는 生活이 그대로 산 스승이 되었다. 또 江陵 親庭집을 생각하며 눈물지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精神的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었다.
李珥가 뒷날 海東孔子라 稱頌받은 것은 모두 師任堂이 禮以 胎敎한 데에서 힘입은 것이라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 吾鼻三尺
(내 코가 석 자다. 즉 내게 닥친 일이 더 힘들고 어려워 다른 일을 돌볼 틈이 없다는 뜻이다)
● 永遠의 微笑, 兒童文學
高句麗, 新羅, 百濟 三國이 鼎立, 卽 솥의 발과 같이 安定을 取하다가 서로 雌雄을 겨루던 때, 慶州에 가난한 兄과 마음씨가 고약한 同生 兄弟가 살았다.
田畓이 없는 兄은 洞네사람에게서 땅을 빌려 農事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뿌릴 씨앗조차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同生에게 付託하기로 했다.
그러자 심술궂은 同生은 싹이 트지 못하게 씨앗을 삶아서 주었다. 兄은 그것도 모르고 씨앗을 뿌린 後 精誠껏 물을 주고 가꾸었으나 웬일인지 싹이 나지 않았다.
‘異常하다. 왜 싹이 안 나오지? 精誠이 不足한 걸까?’
兄은 더 熱心히 물을 주며 精誠을 다하여 가꾸었다. 그러자 그의 精誠에 하늘이 感動했던지 딱 하나의 씨앗에서 싹이 터 올랐다. 그리고 그 싹은 漸漸 자라 엄청나게 큰 이삭을 맺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이삭을 잘라 물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앗! 거기 서라, 거기 서!”
兄은 죽을 힘을 다해 깊은 山속에까지 새를 쫓았지만 끝내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바위 洞窟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搖亂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옷을 입은 도깨비들이 몰려나와 춤을 추기 始作했다.
“金 나와라. 뚝딱!”
도깨비들이 呪文을 외우며 방망이를 휘두르자 神奇하게도 金이 쏟아져 나왔다. 또,
“술 나와라, 뚝딱!”
하고 외치니 이番에는 술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그렇게 방망이를 두들겨 必要한 것을 얻어내며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자 도깨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방망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兄은 그 방망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도깨비들이 한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해보았다.
“金 나와라, 뚝딱! 옷 나와라, 뚝딱! 집 나와라 뚝딱!
그러자 金덩어리가 와르르 쏟아지고, 緋緞옷이 나오고, 大闕 같은 집이 생겨났다. 마침내 兄은 큰 富者가 되었다.
兄이 큰 富者가 되었다는 消息을 傳해들은 同生은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兄에게 쫓아가 細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同生은 當場 그 골짜기로 달려가 洞窟에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어지자 兄의 말대로 도깨비들이 몰려 나와 방망이를 두드리며 놀았다. 그런데 그때 同生이 ‘뽕’하고 방귀를 뀌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도깨비 中에 險狀궃게 생긴 놈이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찾기 始作했다. 그래서 마침내 붙들리고 말았다.
“야, 이놈! 혼 좀 나봐라. 코야 커져라. 뚝딱!”
慾心을 부리던 同生은 도깨비들에게 붙들려 코만 코끼리 코만큼 커져서 돌아왔다.
그로부터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自己 處地가 急하게 되어 남을 도와 줄 餘有가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 烏鳥洗澡
(까마귀가 沐浴한다는 말이니, 本來 타고난 天性은 바뀌지 않는다. 또는 어떤 일을 熱心히 해도 그 보람이 없다는 뜻)
● 雜記에.
高麗 末에서 朝鮮 初期에 걸쳐 官職에 올랐던 亨齋 李稷 (1362~1431)은 世宗 때 領議政에 이르렀다.
高麗 遺臣이었던 그가 朝鮮의 開國功臣으로 벼슬에 오르면서 讓心을 披瀝하여 아래와 같은 時調를 지었다.
까마귀 검다 하고 白鷺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여기서 白鷺는 高麗 末의 세 忠臣 三隱을 比喩한 것이고, 까마귀는 自身과 같은 處地의 人物을 가리킨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時調는 겉으로는 潔白하고 善良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奸邪하고 陰凶한 爲人을 比喩하여 꼬집은 것이다.
까마귀가 눈처럼 흰 白鷺를 보자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저렇게 눈이 부시게 하얄까? 나도 한 番 희게 돼 봐야지!”
까마귀는 곧 湖水가로 가서 하루 終日 아무것도 먹지 않고 繼續 씻었지만 虛事였다. 오히려 虛飢가 지고 精神만 어지러워서 끝내는 죽을 地境에 이르렀다.
本色이 검은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本來 검은 천을 양잿물에 삶고, 헹구기를 거듭한다 해도 純白이 되기란 어렵다.
하물며 검은 까마귀가 희어질 수 있겠는가?
이 말은 타고난 本質은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쓴다.
🍎 玉堅製鞋
(朝鮮의 王族인 玉堅이 만든 신발이라는 말로, 重要한 사람이 만든 貴重한 物件, 卽 名品을 가리킨다)
● 韓國人의 智慧에.
朝鮮 第4代 世宗 (1397~1450)의 아들 漢南大君은 그의 兄 首陽大君이 조카인 端宗을 밀어내고 王(世祖)이 된 것에 不滿을 품고 同生 錦城大君과 함께 端宗 復位運動을 벌이다가 들켜 流配地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興安君도 王族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때문에 興安君의 아들 玉堅도 王孫에서 한낱 庶民으로 轉落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 方道를 찾다가 忠淸道로 내려가 신발을 만드는 匠人이 되었다.
‘已往 신발을 만들 바에야 最高로 잘 만들자. 이것이 나의 自尊心이다. 王孫이 신발을 삼는 것을 猖披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못 만드는 것을 猖披하게 생각하자.’
그는 그길로 갓바치(가죽신 만드는 技術者)를 찾아가 큰절을 올리며 技術을 傳授해달라고 付託했다.
갓바치들은 玉堅이 王族이라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限死코 拒絶하였으나 抛棄하지 않고 眞摯한 姿勢로 每日 찾아와 付託하는 精誠에 感服하여 技術을 傳授해주기로 하였다.
玉堅은 정말로 熱心히 배워 훌륭한 技術者가 되었고, 그리되자 그가 만든 신발을 사기 爲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歲月이 흘러 世祖가 죽고, 睿綜에 이어 成宗이 王位에 오르자 玉堅은 王族으로 다시 復原되어 前과 같이 宗室의 品籍을 되찾았다.
그는 貴人이 되어 가마를 타고, 담비가죽으로 지은 帽子를 쓰고 朝廷에 드나들 때에도 길에서 옛날의 스승 갓바치를 만나면 진흙구렁텅이라도 내려서 큰절을 올렸다. 타고난 心性이 착해서 어려울 때 技術을 가르쳐 준 恩功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報答했던 것이다.
그의 신발 만드는 技術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훗날 사람들은 神技에 가까운 技術을 보면 ‘玉堅이 가죽신 짓던 솜씨’라고 比喩하게 되었다.
🍎 屋漏庇傘
(지붕이 새는 집에서 雨傘으로 비를 가린다. 平生 동안 學問에만 心醉하여 집안 形便을 돌보지 않은 淸廉한 公職者를 比喩한다.)
● 朝鮮人物志에.
世宗 때 右議政을 지낸 柳寬 (1346~1433)은 號가 夏亭으로 經史에 밝고 疎脫한 性格에 學問을 즐겼으며, 諡號는 文簡이다.
그의 집은 漢陽의 弘仁門 밖에 있었는데 초라하여 울타리도, 담도 없었다. 그러자 太宗이 그 事情을 알고 工曹判書에게 命하여 밤中에 아무도 모르게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어주게 하였다.
그는 禮文館 大提學으로 太祖實錄 編纂에도 參與했으며 1418年 世宗 때는 參贊, 贊成을 지내기도 했으며 詩文에도 能했다.
그에게는 淸白吏답게 有名한 逸話가 있다.
어느 해 여름, 장마가 한 달이나 繼續되었다. 그러자 그의 집에 비가 새어 房에 물이 뚝! 뚝! 떨어지니 雨裝으로 몸을 가리어야 했다. 未安하게 생각한 柳寬이 夫人에게 넌지시 말했다.
“우리는 雨裝이라도 있어 多幸인데 그마저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맛비를 무엇으로 견디어낼꼬?”
그러자 夫人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對答했다.
“雨裝이 없는 사람은 다 좋은 집이 있겠지요.”
卽 雨裝이 必要 없는 좋은 집에 살 거라는 말이었다. 듣고 있던 柳寬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는 屋漏庇傘할 程度의 참다운 선비여서 훗날 淸白吏로 選定되었다.
🍎 溫井沐樂
(따뜻한 溫泉에서 沐浴을 하는 즐거움이라는 말로, 雲雨之情을 나눌 때의 快感을 이르는 말이다)
● 古今笑叢 禦眠楯에.
아들 다섯을 둔 六父子 집에서 五兄弟가 모여 삿된 議論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다섯 아들을 두고도 滿足하지 못하시고 隨時로 잠자리를 같이 하신다. 萬一 도 다시 아이를 낳게 되면 畢竟 우리가 업어서 길러야 함은 勿論이고, 더러운 오줌 똥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番갈아가며 當番을 서 두 분이 서로 合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런 苦役을 免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다섯이서 番갈아 父母의 寢所를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날 當番인 막내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릴 때 夫婦가 좋은 機會라 생각하고 누운 채로 껴안아 北合을 시도하다가 그만 막내에게 들켜 버렸다.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엄마! 아직 깜깜한 밤인데 아빠를 업고 어딜 가려고 해?”
夫婦는 일도 하지 못하고 逢變을 當했다.
이튿날, 夫婦는 窮理 끝에 아이들에게 새벽 일찍부터 소를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을 나서는 척하고는 들窓 밖에서 숨을 죽이고 房안의 動靜을 엿듣고 있었다.
夫婦는 모처럼의 조용한 機會를 맞아 猥褻스런 말들을 주고받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男便이 아내의 두 눈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아내가 對答했다.
“그건 八字門이지요.”
男便이 아내의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
“望夫泉이지요.”
다시 코를 가리켰다.
“이건 무엇인가?”
“甘辛峴이지요.”
다시 입을 맞추면서 물었다.
“이건 무엇인가?”
“吐香窟이 아니겠어요.”
이番에는 턱을 가리켰다.
“이건 무엇인가?”
“舍人岩이지요.”
다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이건 무엇인고?”
“雙雲嶺이라 하지요.”
五兄弟가 房안의 情景을 想像하며 웃음을 참고 있는데 이番에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럼 이건 무엇인고?”
“遊船串이라 하지요.”
아랫배 언덕의 불룩한 곳을 만지며 물었다.
“여긴 어디인고?”
“아니, 玉門山도 모르시유?”
“이 검푸른 숲은 무엇인고?”
“甘草田이옵니다.
아버지는 지그시 玉門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건 또 무엇인고?”
“溫井水이지 무예요.”
이렇게 男便의 質問이 끝나자 이番에는 아내가 南便의 陽莖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朱常侍라고 하는 거요.”
다시 睾丸을 어루만자며 물었다.
“이건 또 무엇이예요?”
“음, 그것은 紅同氏 兄弟지, 요즈음 말로는 雙방울이라고도 해.”
이때 다섯 아이들이 各己 기침을 하면서 房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놀란 男便이 벌떡 일어나며 꾸짖었다.
“이놈들! 해가 저물 때까지 소를 돌보라 했는데 어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그러자 다섯 아이들은 소를 배불리 먹이고 沐浴을 시켜서 쉬게 하고 險한 길을 지나왔는데도 꾸중을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에 아버지가 꾸짖었다.
“너희가 나간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디서 풀을 먹이고, 어떤 물에 沐浴을 시켰으며, 또 어디다 쉬게 두었단 말이냐?”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 對答했다.
“처음 八字門으로 나가서 望夫泉과 甘辛峴을 넘어 吐香窟과 舍人岩을 지나 어렵게 雙嶺을 넘어서 遊船串을 건너 玉門山에 올라 甘草田에서 풀을 먹이고, 溫井에서 沐浴을 시켰지요.”
아버지가 怒하여 커다란 막대기를 갖고 逃亡치는 아이들을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그걸 본 건 어떤 녀석이냐?”
“어찌 본 者가 없겠습니까? 朱常侍와 紅同氏氏 兄弟가 證明해 줄 겁니다.”
🍎 溫祚之運
(溫祚의 運數라는 말로 百濟의 始祖 溫祚王에게서 由來했다. 溫祚王의 建國이 順調롭게 잘 이루어졌듯이 하는 일이 잘 풀릴 때를 이른다)
● 三國史記에.
百濟의 始祖는 溫祚王( ?~28年)이고, 그의 아버지는 高句麗의 始祖 東明王 (朱蒙)이다
朱蒙이 처음 北夫餘에서 卒本夫餘로 왔을 때 夫餘 王에겐 딸만 셋이 있었다. 夫餘 王은 朱蒙을 보자 非常한 人物임을 알아보고 둘째 딸을 朱蒙의 아내로 주었다. 朱蒙은 그 夫人에게서 큰 아들 沸流와 둘째 아들 溫祚를 얻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朱蒙이 北夫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 琉璃가 찾아와 太子 자리에 오르자 沸流와 溫祚는 烏干, 馬黎 等 10如 名의 臣下와 더불어 南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漢山에 이르러 負兒嶽에 오르자 地勢를 살피던 地官이 말했다.
“여기는 北으로 漢水에 接하고, 東으로는 높은 山을 依據하며, 南으로는 기름진 平野를 바라보고 있으니 都邑에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그래서 溫祚는 河南 慰禮城 (京畿 廣州)에 都邑을 定하고 나라 이름을 十濟라 하였다. 그리고 그 規模가 커지자 곧 百濟라 改稱하였다. 이때가 前漢 成帝 鴻嘉 3年 B.C. 18年이었다.
그러나 沸流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 무리를 데리고 다시 彌鄒忽 (仁川)로 갔으나, 땅이 濕하고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慰禮城으로 돌아와 보니 百姓이 便安하게 사는 것을 보고 後悔하고 있는데 얼마 있다가 溫祚王이 죽자 그를 따르던 百姓들이 모두 慰禮城으로 돌아오니 百濟의 形勢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리하여 元年 5月에는 東明廟를 세우고 國政을 族父 乙音이 맡아 다스렸다.
紀元前 17年 봄, 溫祚王이 여러 臣下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靺鞨이 우리 北쪽과 境界를 이루고 있어 侵略이 잦으니 武器를 修繕하고 軍糧米를 備蓄하도록 하라.”
그가 國家의 發展은 戰爭의 勝利에서 左右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敵對 國家를 征伐, 統合하여 國家를 튼튼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B.C. 5年에는 都邑地를 南漢山으로 옮겼다.
B.C. 1年에는 馬韓을 合倂하여 國威를 떨치고 城을 構築하여 國家로서의 體制를 굳건히 했다.
溫祚王은 在位46年 동안 領土를 널리 擴張시켰으며, 以後 王位가 아들과 孫子로 이어지면서 三韓의 옛 땅도 모두 百濟에 統合되었다.
🍎 王缺如蝕
(王의 缺陷은 日蝕과 같아서 世上 사람들이 다 안다. 卽 帝王에게도 缺陷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玉에도 티가 있다는 俗談과 같은 意味로 쓰인다)
● 韓國人物考에
成宗(1457~1494)은 朝鮮 第9代 王으로 아랫사람의 意見을 尊重했을 뿐 아니라 百姓들의 言路를 터줌으로써 리더십을 發揮한 聖君이었다.
當時 宮中에서는 날짐승들을 사냥하여 水刺床에 올리기 爲하여 松鶻매를 기르고 있었다.
申從濩 (1456~1497)가 그 松鶻매를 두고 成宗에게 아뢰었다.
“가뭄이 繼續되어서 百姓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殿下께서는 그 對策에 苦心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內鷹房에서는 松鶻매를 기르고 있으니 이것은 殿下께서 娛樂과 놀이에 마음을 쓰시는 것으로 하늘을 恭敬하지 않는다는 證據가 되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成宗은 當場에 松鶻매를 놓아 주라고 했다.
“君子의 허물은 日蝕이나 月蝕과 같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허물을 숨기겠느냐, 잘못이 있으면 當然히 고쳐야 하느니라.”
成宗은 그 자리에서 命令을 내려 허물이 있다는 것을 禁止시켰다. 그러면서 다시 말했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行하고 있을 때에는 果敢하게 諫하여 바른 길로 引導하는 者가 바른 臣下이고, 옳지 않은 일인데도 잘한다고 稱讚하는 者는 阿諂하는 臣下일 뿐이다.”
大學에서 말하기를 참다운 政治家란 百姓이 좋아하면 함께 좋아하고 百姓이 싫어하면 自己도 함께 싫어한다. 이런 사람을 일러 百姓의 어버이라 하는 것이라고 했다.
成宗은 申從濩의 懇言을 듣고 卽刻 自身의 잘못을 고친 훌륭한 帝王이었다.
🍎 王命只一
(王의 命令은 오로지 하나다. 卽 王의 命令은 飜覆되거나 두 個 以上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
朝鮮 第21代 英祖(1694~1776) 때 宋明欽(1705~1768)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스무 살 前에 이미 學者로서 囑望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벼슬에는 全혀 뜻이 없어 王이 몇 番을 불러도 辭讓하고 官職에 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 思悼世子 事件이 일어났다.
英祖는 世子를 斬刑키로 酌定하고, 大臣들은 勿論 草野의 明賢들을 불러 그 問題를 議論하게 했다. 宋明欽도 그 자리에 參席했다. 王의 뜻이 이미 確固함을 눈치 챈 參席者들은 거스르는 소리를 했다가는 어떤 逢變을 當할지 모르므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宋明欽이 홀로 反對하고 나섰다.
“殿下, 東西古今을 두고 暴君으로 指彈을 받고 있는 帝王들도 子息을 죽이는 惡行만은 저지르지 않았나이다. 어찌 차마 殿下께서 先例를 남기려고 하시나이까?”
英祖는 크게 怒하여 卽時 宋明欽을 내쫓았다. 그러고는 宣傳官에게 칼을 내리며 命令했다.
“저 者의 뒤를 밟다가 그가 곧장 自己 집으로 가지 않고 途中에 다른 집에 들르거든 그와 그 집 主人의 목을 베어 오너라. 萬一 곧장 집으로 가거든 그대 또한 따라 들어가 王命으로 刑을 執行하러 왔다고 말해라. 그래서 그가 怨望하는 氣色 없이 刑을 받으려고 하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辨明을 늘어놓거든 목을 자르도록 하라.”
王이 宋明欽의 行動을 알아보라고 한 것은 그가 어느 黨派의 使嗾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疑心했기 때문이었다.
宋明欽은 쫓겨나는 瞬間부터 自己가 無事하지 못 할 것임을 直感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王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宣傳官이 들이닥치더니 王을 誹謗한 罪로 斬刑을 내린다고 했다. 이미 覺悟하고 잇던 宋明欽은 順順히 죽을 準備를 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
“殿下의 命令인데 臣下된 者가 어찌 拒逆할 수 있겠소. 御命에 따르고자 할 뿐이외다.”
宣傳官은 칼을 거두며 비로소 王의 뜻을 이야기했다.
宋明欽은 듣고 나더니 몸을 바로 세우고 冷情하게 말했다.
“그것은 王이 臣下를 籠絡하는 일이오. 아무리 君王이라도 臣下를 籠絡해서는 안 되며, 王命은 至嚴한 것이므로 한 番 말이 떨어지면 돌이켜서는 아니 되오. 어서 내 목을 쳐 王命을 바르게 세우시오."
그는 斬首되었다.
🍎 蛙以求命
(개구리로 사람의 生命을 救하다. 卽 적은 것으로써 큰 일을 解決하는 智慧로운 行動을 말한다)
● 古今淸談에.
朝鮮 第22代 正祖 때의 左議政 金鍾秀(1728~1799)는 本貫이 淸風이고, 號가 夢梧, 諡號는 文忠이다. 그가 黨弊를 일으킨 罪로 慶尙道 機張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의 吏房 집에서 한 해 여름을 나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난데없이 毒蛇 한 마리가 배 위로 기어올라 왔다. 사람들은 氣怯을 했다. 本人을 깨우면 畢竟 몸을 움직일 테고, 그리되면 놀란 毒蛇가 물게 될 것이 뻔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데 吏房의 어린 아들이 잽싸게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뱀 곁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던졌다.
개구리는 폴싹폴싹 뛰어 달아났다.
그것을 본 毒蛇는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재빨리 金鍾秀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어린 아이의 智慧가 어른의 生命을 救해낸 것이다.
🍎 蛙利鷺
● 高麗 李奎報 文集에.
高麗 明宗 임금이 하루는 單獨으로 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山中에서 날이 저물었다.
僥倖히 民家를 하나 發見하고 하루를 묵고자 請을 했지만,
집 主人(李奎報 先生 1168~1241)이 조금 더 가면 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 집 大門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오직 나에게는 개구리가 없는 게 人生의 恨이다."
(唯我無蛙 人生之恨)
"都大體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智識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到底히 感이 잡히지 않았다.
酒幕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酒母에게 외딴 집에 對해 물어 보았다.
그는 科擧에 落榜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冊만 읽으면서 살아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症이 發動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事情事情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主人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해서 面談을 申請했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 이란 글에 對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日 後에 노래試合을 하자"는 것이었다.
白鷺(황새)를 審判으로 하고 노래試合을 하자고 했다.
이 提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 커녕 목소리 自體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自身에게 노래試合을 提議 하다니...
하지만 越等한 實力을 自信했기에 試合에 應했다. 그리고 3日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努力했다.
그런데, 反對로 노래試合을 提議한 까마귀는 노래 練習은 안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白鷺한테 賂物로 가져다주고 뒤를 付託한 것이었다.
約束한 3日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曲씩 부르고 審判인 白鷺의 判定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自身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이미 勝負는 하나마나라 생각했다. 그런데 審判인 白鷺가 까마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試合에서 까마귀에 敗北한 理由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白鷺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쓰게되어 本人이 敗北한 事實을 알게 되었다.
그 後 꾀꼬리는 크게 落膽하고 失意에 빠졌다.
그리고 "나에겐 개구리가 없는 게 人生의 恨이다"라는
글을 大門앞에 붙혀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李奎報 先生이 임금한테 不義와 不法으로 賂物을 갖다 바친 者에게만
科擧及第의 機會를 주어 不正腐敗로 얼룩진 나라를 比喩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蛙利鷺 란 말이 생겼다.
李奎報 先生 自身이 생각해도,
그의 實力이나 智識은 어디에 내놔도 안떨어지는데 科擧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政丞의 子息이 아니라는 理由로 科擧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自身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立場이지만, 까마귀가 白鷺한테 개구리를 上納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科擧에 番番히 落榜하여 草野에 묻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집 主人의 人品을 高尙하게 여겨 훗날 나라에 쓸만한 사람으로 判斷되었기에, 自身도 科擧에 여러 番 落榜한 떠돌이 선비라고 紹介하며, 5日 後에 臨時 科擧가 있다 해서 開城으로 올라가는 中이니 함께 應試함이 어떠한야며 거짓말을 하였다.
그 後에 宮闕에 들어와 臨時科擧를 열 것을 命하였다고 한다.
科擧를 보는 날, 李奎報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準備를 하고 있을 때 試驗官이 내 걸은 詩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 이란 여덟 글字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李奎報는 임금이 계신 곳을 向해 큰 절을 한 番 올리고 答을 적어 냄으로서 壯元及第하여 次後 有名한 學者가 되었다.
이때부터 "蛙利鷺 (唯我無蛙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의 詩 한 首
( 吟井中月 ~詠井中月)
山僧貪月色 ~ 山속의 스님이 달빛이 貪이나
竝汲一甁中 ~ 물과 함께 甁속에 달을 담았네.
到寺方應覺 ~ 절에 이르르면 그때야 알리라
甁傾月亦空 ~ 甁을 기울이면 달은 없는 것을...
☆ 蛙餌料
中國 寓話로 꾀꼬리와 뜸북이(까마귀라고도)가 노래試合을 하게 되었는데 3日後 황새에게 審判을 받기로 했다.
꾀꼬리는 노래를 熱心히 練習했으나 뜸북이는 그 사이 개구리를 賂物로 바쳤다.
뜸북이의 勝利로 끝났다
※ わいろ [賄賂] 日本語 뜻은
(1) 賄賂
(2) 不正한 意圖로 他人에게 金品을 贈與하는 것
(3) 職務에 關해서 授受하는 不正한 利益 또는 그 金品.
🍎 王不食言
(王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責任있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한 番 말한 것은 꼭 實踐해야 한다는 말이다)
● 三國遺事에.
高句麗 第25代 平原王 때 溫達 (?~590)은 容貌나 겉모습은 대단치 않게 보였으나 마음은 착하고 純朴했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동냥을 하여 어머니를 奉養했다. 그는 平素 해진 적삼에 헌 신발 차림으로 다니면서도 恒常 웃고 있어 사람들은 바보라고 놀렸다.
한便, 平原王의 어린 딸 平岡公主는 울기를 잘해서 그때마다 王이 弄談으로 말했다.
“네가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分明 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하겠구나, 그러니 바보 溫達에게나 媤집보내야겠다.”
公主는 울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라 그 말을 잊지 않고 記憶했다.
公主의 나이 16歲가 되어 相府의 高氏에게 媤집보내려고 하자 公主가 말했다.
“大王께서는 저를 溫達에게 媤집보내겠다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飜覆하십니까? 匹夫도 食言하면 아니 되는데 하물며 大王께서 그러하시다뇨?”
王이 딸의 말을 듣고 怒하여 말했다.
“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로 認定하지 않겠으니 네 맘대로 갈 곳을 찾아가거라!”
그리하여 公主는 얼마간의 佩物을 챙겨 溫達의 집을 찾아갔다.
溫達의 어머니는 장님이었다. 公主가 아들 있는 곳을 물으니 老母가 對答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襤褸하여 貴人이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되오, 只今 當身의 香水 냄새를 맡아 보니 꽃같은 香氣가 普通이 아니고, 손을 잡아 보니 부드럽기가 솜 같으니 天下의 貴人임에 틀림없소,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내 子息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山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公主는 山으로 가서 溫達을 만나 自己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溫達이 성을 내며 避해버렸다.
“이는 分明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鬼神임이 分明하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公主는 다시 母子를 찾아가 自己가 찾아오게 된 事情을 仔細히 털어놓았다. 溫達이 머무적거리고 있자 어머니가 말했다.
“내 子息이 不足하고, 내 집 또한 몹시 가난해서 貴人께서 살기에 適當치 않으니 그냥 돌아가시오.”
公主가 對答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穀食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했는데, 眞實로 마음이 있다면 무슨 相關이 있겠습니까? 먹고 사는 것은 제가 가지고 온 佩物로 마련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女는 곧 金팔찌를 팔아 집과 牛馬, 家財道具들을 사들여 살림을 갖추었다. 그리고 溫達에게 일렀다.
“무릇 男兒라면 반드시 말을 잘 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저잣거리에 나가 말을 사는데, 病들고 여위었더라도 반드시 國馬를 사 오십시오.”
溫達이 그 말대로 하자 公主는 熱心히 거두어 말이 날로 살이 찌고 健康해졌다.
한便, 高句麗에서는 每年 3月3日에 樂浪의 언덕에서 사냥으로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神에게 祭祀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王이 사냥을 나서게 되니 여러 臣下와 軍士들도 出動했다.
溫達도 公主가 기른 말을 타고 參加했는데 말이 워낙 날쌔어서 그가 잡은 擄獲物이 第一 많았다. 그래서 王 앞에 나아가 自己의 身分을 밝히고 賞을 받았다. 그러나 王은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北周의 武帝가 軍士를 일으켜 遼東을 치니, 王은 軍士를 이끌고 拜山에 나아가 戰鬪를 벌였다. 이때 溫達이 先鋒이 되어 單番에 敵軍 數十如 名을 베니, 我軍의 士氣가 올라 크게 이겼다.
戰功을 論할 때 모두들 溫達의 功勞가 第一이라고 하니 王은 그제야 사위로 맞아들이고, 大兄이라는 爵位를 주었다.
平原王이 죽고 嬰陽王이 卽位하자 溫達이 아뢰었다.
“只今 新羅가 우리 漢北의 땅을 갈라 自己네의 郡과 縣으로 만들었는바 百姓이 寃痛히 여겨 憤怒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臣에게 軍士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王이 기뻐하며 許諾했다.
溫達은 雞立峴과 竹嶺 西쪽의 땅을 모두 回復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盟誓하고 떠났다. 그러나 阿旦城 (只今의 서울 워커힐 뒷 山) 아래에서 新羅 軍士와 싸우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戰死했다. 그래서 그를 葬事지내려 하는데 棺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公主가 와서 官을 어루만지며 慰勞했다.
“將軍! 이제 큰일을 마치셨으니 돌아가 便히 쉬십시오.”
그제야 棺이 들려 葬事를 지낼 수 있었다.
地位가 높을수록 正直하여 模範이 되어야 하고, 約束은 꼭 지켜야 한다는 이 말은 混濁한 요즈음의 世代에 더욱 要求되는 말이다.
🍎 王耳驢耳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로, 新羅 景文王에 얽힌 故事에서 由來했다. 世上에 秘密을 維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말이다)
● 三國遺事에.
新羅 第48代 景文王(在位861~875)은 이름이 膺廉이며, 나이 18歲에 國仙 花郞이 되었다. 阿湌 啓明 아들이며, 어머니는 光和夫人이었다.
膺廉은 18歲에 國仙이 되어 四方을 두루 돌아다니며 物情을 把握했다.
그에게 憲康王이 물었다.
“ 膺廉은 全國을 돌아보면서 무슨 좋은 일을 보았는가?”
“예. 行實이 바른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 어디 仔細히 이야기해보아라!”
“地位가 높은 사람이 謙遜하여 百姓의 밑에 있는 것처럼 處身하는 것이 그 첫째요, 勢力이 있고 富者이면서 옷차림이 儉素한 이가 둘째였으며, 貴하고 勢力이 있는데도 威勢를 보이지 않는 이가 그 셋째였습니다.”
그 말에 王은 그의 어진 品性을 알아보고 말했다.
“내게 두 딸이 있는데 너의 시중을 들게 해도 되겠는가?”
“네. 그 일은 重大事이니 집에 가서 父母님과 相議한 後 말씀드리겠습니다.”
膺廉이 물러나와 家族과 相議했다.
家族들은 맏 公主는 얼굴이 초라하고 못 생겼으니 예쁘고 아름다운 둘째 公主를 맞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때 興輪寺의 한 스님이 膺廉을 찾아와 물었다.
“王께서 公主를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事實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어느 公州를 選擇하려 하시오?”
“父母님께서 둘째 公主에게 丈家들라 해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아니오. 맏 公主에게 丈家들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膺廉은 맏 公主에게 丈家를 가게 되었다.
얼마 後 王이 病을 얻어 危毒해지자 臣下를 불러놓고 말했다.
“내게 王子가 없으니 맏딸의 男便 膺廉으로 하여금 王位를 繼承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王位의 承繼式이 끝나자 그 스님이 景文王이 된 膺廉을 찾아와 아뢰었다.
“이제 제가 前에 아뢰었던 세 가지 좋은 일을 다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맏 公主에게 丈家듦으로써 王位에 오른 것이고, 둘째는 前에 欽慕했던 둘째 公主에게도 丈家들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는 못생긴 맏 公主에게 丈家듦으로써 王과 王妃에게 기쁨을 드렸으니 그 또한 좋은 일 아닙니까?”
王은 그 자리에서 스님에게 大德이라는 벼슬과 함께 金 130兩을 내렸다. 景文王이 王位에 오르자 놀라운 일이 거듭 생겼다.
그 하나는 밤마다 王이 起居하는 房에 뱀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內人들이 놀라 쫓아내자 王이 말했다.
“뱀은 나의 親舊이니 쫓아내지 말라.”
그러고는 뱀처럼 혀를 널름거리며 잤다.
또 하나는 王位에 오르자마자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된 事件이었다. 王后와 宮人들은 이를 알지 못했으나 복두장(幞頭匠. 冠을 만드는 匠人)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다.
幞頭匠은 秘密을 發說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平生토록 自己만 간직하고 있다가 죽음이 다가오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道林寺의 대숲 속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뒤로 바람이 불면 道林寺의 대숲에서는 그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나왔다.
놀란 王은 대나무들을 베어내고 代身 山茱萸를 심게 했다. 그랬더니 그 뒤로는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임금님 귀는 기다랗다.
🍎 王兄佛兄
(王兄佛兄은 王의 兄과 부처의 兄이란 뜻으로, 부러운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朝鮮 太宗의 맏아들 讓寧大君은 술만 마시고 미치광이처럼 放蕩의 길을 걸어 世子에서 廢位되고 셋째인 忠寧大君(世宗大王)이 世子가 되었다.
일찍이 둘째 아우 孝寧大君은 山속에 들어가 부처가 되어 佛事를 베풀어 兄을 불렀다.
讓寧大君은 일부러 여우와 토끼를 죽이고 술 단지를 갖추어 가지고 갔다. 孝寧大君이 부처에게 절을 하며 念佛할 때 옆에서 讓寧大君이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자 孝寧大君이 성을 내며 “오늘만은 술과 고기를 삼가시오”하고 懇請하니 讓寧大君이 웃으면서 “平生에 厚福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서는 王兄이요, 죽어서는 佛兄이 될 것인데 무엇을 求하려고 素食을 먹으며 苦生을 하겠는가!”하며 泰然하였다고 한다.
🍎 龍夢壓券
(龍꿈이 壓券이다. 卽 龍꿈이 第一 좋아 科擧試驗에 合格한다는 말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으면 實際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 梅山集에.
朝鮮 第21代 英祖 때 李鎭衡 (1723~1781)은 本貫은 全州이고, 號는 南谷이며, 諡號는 忠簡이다.
1753年, 李鎭衡이 庭試(나라에 慶事가 있을 때 大闕에서 보던 科擧試驗)를 보게 되었다. 그는 꿈에 龍을 보면 壯元及第한다는 말을 믿고 龍꿈을 꾸고자 房門을 걸어 잠그고 자나깨나 오로지 龍만을 想像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마침내 黃龍이 나타나 自己의 허리를 감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科擧場에 나가니 出題된 問題가 平素에 自己가 熱心히 工夫했던 內容이었다. 그래서 쉽게 合格해 꿈에도 그리던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科擧는 競爭率이 높은 만큼 採點에 公正을 期하기 爲해 應試者들의 글을 直接 놓고 採點하지 않고 試驗官이 署理를 시켜 答案紙를 붉은 글씨로 다시 옮겨 베끼게 한 後 그것을 가지고 採點했다. 이는 採點官들이 應試者의 筆跡을 알지 못하게 하기 爲함이었다. (應試者가 쓴 答案紙를 本草라 하고, 옮겨 베낀 寫本을 朱草라고 했는데, 易書가 끝나면 對照를 맡은 査同官과 枝同官이 嚴密히 對照한 다음 朱草만 試驗官에게 넘겨서 採點하게 했다.
이날 李鎭衡의 答案은 그야말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文章으로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優秀한 成績을 올린 者의 答券(答案紙)을 다른 答券의 第一 위에 얹어 놓는 慣習이 있었다. 이것은 다른 答券을 누를 만큼 優秀하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壓券’이란 말이 由來하게 되었다.
벼슬자리에 올라선 李鎭衡은 1777年 左副承旨에 올랐다가 工曹判書를 거쳐 大司憲을 歷任했다.
그는 兵法에도 밝았으며, 楷書, 草書도 잘 썼다.
🍎 用碑掩哀
(碑石을 利用하여 슬픔을 막다. 卽 實質的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도 名分만 그럴싸하게 내세워 事實을 糊塗한다는 뜻.)
● 吳尙源 寓話에.
山속에 사는 여러 種類의 動物들이 權益을 保障받기 爲해 代表를 뽑기로 했다.
먼저 議長 先出 投票에서 호랑이가 뽑혔다.
壇上에 오른 호랑이는 의젓한 姿勢로 議事棒을 딱딱 두드리며 人事말을 햇다.
“여러분! 우리 動物王國도 이제 專制君主制를 버리고 立憲政治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只今까지 弱하고 착한 動物家族들은 强者의 橫暴 속에 너무도 많은 抑壓과 서러움을 받아왔으나 이제부터는 똑같은 權益을 갖고 生存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榮光과 喝采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호랑이를 비롯한 肉食動物들에게는 當場 苦憫이 생긴 것이다.
山羊, 사슴, 토끼 等 草食動物들은 가는 곳마다 茂盛한 풀숲에서 싱싱한 풀잎과 藥草 等을 마음껏 뜯어먹고 뛰놀 수 있었지만 이들을 잡아먹고 살던 肉食動物들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마다 눈앞에 살찐 먹잇감을 두고도 군침만 삼켜야 했다.
그런데 이리 代表가 死色이 되어 호랑이 議長에게 달려 왔다.
“議長님! 都大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同族들이 宅과 같은 호랑에게 잡혀 먹혔습니다.”
이리 代表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승냥이 代表가 헐떡이며 넋이 빠져 달려왔다.
“議長님, 큰일 났습니다. 이리란 놈들이 우리 同僚를 셋이나 잡아먹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뒤따라 여우 代表가 쫓아와 울먹이며 呼訴했다.
“議長님, 승냥이란 놈들이 우리 어린 子女들을 마구 잡아갔습니다. 집 앞에서 天眞하게 놀고 있던 어린것들을……. 어찌 이럴 수가…….”
여우의 눈물겨운 呼訴가 채 끝나기도 前에 山羊과 사슴 代表가 핏기를 잃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들이 急히 抑鬱함을 아뢰려 할 때 토끼 代表도 恐怖에 질린 낯으로 어깨숨을 들까불며 달려왔다.
“議長님,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씀입니까? 착하고 弱한 저희 同僚들은 只今 모두 죽음의 길목에서 떨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십시오.”
草食動物들의 呼訴는 한결같이 똑같았다.
이들의 애처로운 呼訴를 듣고 있던 肉食動物 代表들은 立場이 몹시 難處하고 계면(慊然)쩍어지기 始作했다.
앞 뒤를 모두 듣고 보니 自己들 한 두 食口가 잡혀 먹혔다는 건 問題가 아니었다. 가장 犧牲을 많이 입고 있는 것이 山羊과 사슴, 토끼 族들임이 뻔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事態는 妙하게 되어 버렸다. 草植動物들을 잘 撫摩해내지 못하면 肉食動物들은 그야말로 死活의 岐路에 설 판이었다.
눈치 빠른 여우가 急히 승냥이에게 뭔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어서 승냥이가 이리에게 귀속말을 傳했다. 이리는 또 어깨를 으쓱이며 호랑이에게 이를 傳했다. 그러자 호랑이의 입가에 웃음이 빙그레 떠올랐다. 이윽고 호랑이 議長은 動物 代表들을 죽 돌아보며 敬虔하고 嚴肅한 態度로 입을 열었다.
“아! 가엾도다. 착하게 살다 죽어간 너희들을 爲해 우리는 謙虛한 마음으로 慰靈碑를 세워주기로 合議를 했다.”
그리하여 동산 한가운데에 慰靈碑가 세워졌다. 肉食動物들은 우레같은 拍手를 熱烈히 보냈다. 그러나 草食動物들은 華麗한 慰靈碑 周圍에 모여 서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 用秤算數
(저울을 利用하여 數를 세다. 어떤 일을 處理할 때 壅拙하게 部分的으로, 執着하지 않고 巨視的으로 處理함을 뜻한다.)
● 韓國 天主敎會史. 古今淸談에
朝鮮 第21代 英祖 때 吏曹判書 李天輔(1098~1761)가 四寸兄 李國輔의 집을 訪問하게 되었다. 李國輔의 집에서는 오는 사람이 비록 同生이기는 했지만 國事를 돌보는 判書이기에 鄭重하게 맞을 準備를 서둘렀다.
그런데 일곱 살 난 國輔의 아들 文源. (1740~1794)이 손님맞이를 爲해 고기를 굽고 있던 어머니에게 고기 한 點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손님을 待接할 飮食이라며 주지 않자 文源은 食칼을 들고 외양간으로 가서 牛囊(소의 불알)을 베겠다고 덤벼들었다.
그때 막 大門 안으로 들어서던 李天輔가 그 光景을 보고 兄에게 물었다.
“兄님, 저 애가 食칼을 들고 뭐하려고 저럽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굽는 고기를 한 點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았더니 牛囊을 베어 먹겠다고 저러질 않는가, 다 내가 敎育을 잘 시키지 못한 탓이지.”
國輔는 아들을 불러들여 叔父에게 人事를 하게 했다.
文源은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漢陽의 判書는 別다른 사람인가 했더니 普通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잖아.”
그 말을 들은 天輔가 兄님 國輔에게 말했다.
“제가 兄님 아들 中에서 養子를 하나 들일까 하여 왔는데, 저놈을 주시면 안 될까요?”
國輔는 何必이면 개구쟁이를 고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데려가라고 承諾했다.
이렇게 하여 漢陽으로 올라온 文源은 如前히 床奴들과 어울려 놀며 장난만 쳤다. 보다 못한 養아버지 天輔는 文源에게 獨先生을 들여 千字文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이레가 지나도 天字文의 ‘天地玄黃’ 첫 줄도 읽지 못했다.
天輔는 속으로 ‘저놈이 將來 못되어도 判書는 될 줄 알았는데’ 하고 속으로 서운해 했다. 그래서 窮理 끝에 下人과 짜고 文源을 불러 말했다.
“네가 工夫에는 마음이 없고 날만 새면 장난만 치니 너를 내칠 수밖에 없다. 當場 짐을 싸서 옛날 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하고는 下人을 딸려 本來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城 밖에 나가자 下人이 말했다.
“도련님은 참 딱도 하십니다. 工夫만 잘하면 벼슬도 할 수 있고 남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이제 다시 시골구석으로 내려가 나뭇꾼이나 되게 생겼으니……. 쯧쯧!”
그러자 文源이 冷笑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렴 그까짓 千字文쯤 모르겠어? 다 理由가 있어서 그런 거라구, 書齋를 보니까 冊이 山더미처럼 쌓였던데 섣불리 아는 체했다가는 만날 冊하고 씨름만 하게 될 것 같아서 숫제 모르는 체했던거야, 내가 써보여 줄까?”
그러고는 땅바닥에 千字文을 줄줄 써내려 갔다.
下人은 기쁨을 감추고 말했다.
“아차! 도련님, 제가 깜빡 잊고 안 가져온 物件이 있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는뎁소.”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 天輔에게 文源의 行動을 傳했다.
天輔는 그 消息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文源에게 말했다.
“내 許諾 없이 다시 돌아왔으니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 하겠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린 네가 먼 길을 가는 게 어려운 일인 듯싶어 그냥 容恕하겠다. 그 代身 罰로 광(庫房)에서 조 한 말을 퍼다가 내가 돌아오는 저녁 때가지 그 數字를 모두 세어 놓도록 하여라.”
文源은 養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如前히 놀기만 했다. 그러고는 天輔가 退廳할 무렵쯤 되자 그제야 저울을 가져다가 좁쌀 한 돈 쭝을 달아서 그 數를 헤아려 놓고, 그 다음에는 똑같은 分量으로 달아서 全體의 數를 計算하였다.
天輔는 文源이 제아무리 부지런히 세어도 다 세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文源을 불러 좁쌀이 모두 몇 個나 되더냐고 물었다.
“예. 모두 某某 個였습니다.”
天輔는 깜짝 놀랐다. 到底히 셀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都大體 어떻게 헤아렸는지 궁금해서 그 方法을 물었다. 文源은 거침없이 說明했다. 그 計算 方法을 듣고 난 天輔는 크게 感嘆했다.
“그래 壯하다. 이제부터는 글을 익히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런데 지나치게 글에만 매달리다 보면 자칫 小人輩가 되기 쉽다. 그러나 行實과 마음을 닦는 일도 疎忽히 해서는 안 되느니라.”
그 後 李天輔가 뒤주大王 思悼世子를 擁護하다가 世子가 8日 만에 뒤주 안에서 죽자 臣下로서 責任을 다하지 못했다는 自責感으로 自決했다. 그리하여 훗날 思悼世子의 아들 正祖는 李天輔의 義理를 생각하여 天輔의 養아들 文源을 親同生같이 보살펴 주었다.
正祖는 文源이 썩 밝지 못하지만 큰일을 大汎하게 處理하는 能力이 있는 人才임을 알고 全羅道의 科擧 試驗官으로 任命하여 내려 보냈다.
그가 地方에 내려가자 그곳 官僚들은 考試官이 글에 밝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奇貨로 한몫 챙기려고 벼르고 있었다. 文源은 내려가자마자 모든 일을 그곳 試官들에게 맡기고 날마다 妓生집에서 술만 마시며 즐겼다.
科擧가 끝난 後, 文源은 試官들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놈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니 글 內容 좋고, 글씨 잘 써진 것 몇 點만 골라 주시오.”
그러자 멋모르는 試官들은 眞짜로 優秀한 答案紙를 챙겨 주었다. 文源은 그 答案紙 作成者를 壯元으로 決定하여 中央으로 올렸다.
그 글에는 賂物去來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直感한 措置였다.
正祖는 全國 各地에서 올라온 글을 보고 난 뒤, 文源이 選拔하여 올린 글이 그 어떤 글보다 優秀함을 보고 기뻐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이처럼 훌륭한 人才를 뽑을 수 있었느냐?”
文源이 事實대로 아뢰니 正祖는 다시 한 番 感嘆했다.
“그대야말로 名試官이로다. 亦是 글만 잘한다고 모두 잘하는 게 아니야.”
그 後 文源은 東萊副使에서 慶尙道 觀察使가 되고 大司成을 거쳐 咸鏡道 觀察使와 吏曹判書를 歷任하고 宰相으로 除授되었으나 自己의 分數에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辭讓했다. 諡號는 翼憲公이다.
🍎 牛公交人
(소가 사람을 바꾸다. 慶南 泗川地方에 傳해져 오는 옛날이야기에서 由來한 말로, 全혀 뜻밖의 原因으로 狀況이 바뀌었음을 뜻한다)
● 韓國人 野談集
慶南 泗川市 泗南面에 사는 黃致宇 令監이 기르던 암소를 팔기 爲하여 市場에 갔다가 亦是 소를 팔러 온 査頓 禹在永 令監을 만났다 두 사람은 반갑게 人事를 나누었다.
“査頓어른께서도 소를 팔러 오셨습니까?”
“예. 암소를 黃소로 바꿀까 해서 나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黃소를 암소로 바꾸려고 나왔는데 그것 참 잘됐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査頓間에 소를 맞바꾼다면 仲介人한테 口錢을 줄 必要도 없으니 그 돈으로 술이나 한 盞 합시다.”
두 査頓 令監은 仲介人에게 줄 돈으로 술집에 들어가서 勸커니잣커니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밤이 이슥해서야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서로 소를 바꾸어 타고 집으로 向했다. 그런데 自己들의 運命이 바뀐 줄을 모르는 소들은 平素 自己가 살던 집으로 졸랑졸랑 돌아갔다.
그러니까 市場에서는 査頓끼리 소를 바꾸었는데, 집으로 갈 때에는 소가 사람을 바꾸어 태우고 간 꼴이 된 것이다. 卽 사람이 바꾸어진 것이다.
兩家의 안房마님은 그것도 모르고 캄캄한 밤인지라 소는 외양間으로 몰아넣고 바깥兩班은 안房으로 모셨다. 그리고 술 냄새가 코를 쏘는 것을 참으면서 꼭 껴안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兩家의 안房마님들은 질겁을 했다. 荒唐한 事態가 벌어진 것이다. 서로 껴안고 밤을 지새운 令監이 自己의 令監, 마누라가 아니라 바깥査頓, 안査頓이었으니 啞然失色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우째 査頓어른이……?”
눈이 휘둥그레진 안査頓이 질겁을 했다.
“제기랄! 査暾이구 뭐구 只今 우리 집에서는 무슨 亂離가 났을꼬?”
사람이 소를 바꾼 것이 아니라 소가 主人을 바꾸어 태우고 오는 바람에 일어난 騷動이었다.
🍎 憂國如家
(나라 걱정을 내 집 일처럼 한다는 말로, 趙光祖가 王道政治를 實現해서 改革을 斷行한 故事에서 由來했다.)
● 古今淸談에.
燕山君 때, 靜庵 趙光祖 (1482~1519)는 寒暄堂 金宏弼, 退溪 李滉, 晦齋 李彦迪, 一蠹 鄭汝昌 等과 더불어 五賢으로 推仰받아 文廟 (孔子의 祠堂)에 配享되었다.
그는 14歲 때 熙川에 귀양 가 있던 金宏弼에게서 學問을 배웠다. 이때부터 性理學 硏究에 힘써 훗날 金宗直의 學統을 이은 士林派의 領首가 되었다.
士林派가 要職에 있게 되자 勳舊派를 外職으로 몰아내고 全 功臣의 3/4을 削除하는 急進的인 改革을 斷行했다. 이 일은 勳舊派의 決定的인 反撥을 誘發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新進士類를 誣告하는 事態가 생기게 되었다.
趙光祖는 어려서부터 氣槪가 남달라서 相對가 누구이건 間에 直言을 서슴치 않았다.
한 番은 스승인 金宏弼이 祭祀에 쓸 꿩고기를 下人들을 시켜 햇볕에 말리게 했다. 그런데 말리는 中에 고양이에게 도둑을 맞고 말았다. 金宏弼이 크게 성이 나서 그 下人을 事情없이 꾸짖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趙光祖가 아무리 스승이라 하지만 度가 지나치다 싶자 斷乎하면서도 恭遜히 말했다.
“祖上의 祭祀에 精誠을 다하는 것도 重要하지만 웃어른으로서의 말씨 또한 지나치지 않도록 操心하여야 될 것으로 思料됩니다.”
그러자 金宏弼이 無顔해 하면서 말했다.
“그래! 나도 크게 後悔하고 있는데, 너의 마음도 나와 같구나. 네가 바로 나의 스승이다.”
趙光祖는 임금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眞正한 憂國衷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과 사람의 根本은 理에 있다고 믿었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根本이기에 하늘은 사람에게 그 理致가 아님이 없고, 임금과 百姓도 하나에 根本하니 임금은 百姓에게 그 道理가 아님이 없다. 따라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여 마음속에서 是非와 善惡이 모두 그 理致를 얻고 天下의 物이 公平함을 얻으면 이것이 萬化가 서는 까닭이고 治道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卽 사람과 하늘이 하나에 根本한 것이 理요. 임금과 百姓이 하나에 根本한 것이 道라고 했다.
또 言路에 對하여서는 이렇게 上疎했다.
‘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 便安하고, 言路가 막히면 어지러워져 結局 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王은 言路를 넓히는 데 힘쓰고 下級館吏나 시골의 百姓에까지 미쳐져야 비로소 政事를 잘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趙光祖는 大德을 펼쳤지만 時代가 그를 許諾하지 않았다.
第11代 中宗 때 奸臣들이 그를 謀陷하기 爲하여 大闕 안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 먹게 한 後, 그 나뭇잎을 따다 임금에게 바치면서 그를 逆賊으로 謀陷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마침내 綾州에 流配되고, 賜藥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겼다.
愛君如愛父 ~ 임금 사랑하기를 父母 사랑하듯 하였고
愛國如憂家 ~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과 같이 하였어라.
天日照丹衷 ~ 저 하늘의 햇빛이 이내 붉은 속을 비추니
昭昭臨下士 ~ 밝은 빛이 이 속마음을 비추어주네.
趙光祖는 己卯年 11月 15日 洪景舟로부터 密告를 받아 그해 12月에 38歲의 짧은 나이로 生을 마감했다.
愛國如家는 이 詩에 根據한 成語이다.
🍎 牛乘政丞
(소를 탄 政丞이라는 말로, 一人之下 萬人之上에 있으면서도 疎脫하게 生活하는 사람, 卽 地位를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處身하는 사람을 말한다.)
● 海東名臣錄에.
朝鮮 第4代 世宗 때 左議政에까지 올랐던 古佛 孟思誠(1359~1438)이 溫陽에 계신 父母님을 뵈러 길을 떠났다. 그는 워낙 疎脫한 性品이라 번거로운 行次 代身에 소를 타고 侍童에게 고삐를 잡게 하여 단출하게 길을 나서니 零落없이 시골 老人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溫陽에서 가까운 고을의 使道들이 서울에서 政丞이 내려온다는 消息을 듣고 길목에 나와서 遮日을 치고 盛大하게 歡迎할 準備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가 지났는데도 政丞의 行次는 나타나지 않고 소를 탄 한 초라한 老人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짜증이 난 사또(使道)들이 刑房더러 그 老人을 잡아오라고 했다. 刑房이 쫓아가자 소를 탄 老人이 말했다.
“溫陽 사는 孟古拂이라고 하면 사또께서 꾸짖지 않을 걸세.”
刑房이 돌아가 老人의 말을 傳하자 사또들은 깜짝 놀랐다. 古佛은 孟思誠의 號였다.
魂飛魄散한 사또들이 孟思誠을 쫓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으나 孟思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孟思誠은 詩文에 能하여 八道地理誌를 撰述하였으며, 鄕約을 整理하는 等 많은 業績을 남겼다.
그는 같은 時代를 살았던 黃喜와는 對照的이었다.
黃喜가 모든 일에 分明하고 正確하며 剛直했다면, 孟思誠은 어질고 부드럽고 纖細했다.
그래서 黃喜가 學問的이고 謹嚴했다면 孟思誠은 柔軟하고 너그러우며 藝術家的인 人物이었다. 때문에 黃喜가 兵曹나 吏曹의 果斷性 있는 業務에 能했다면 孟思誠은 藝曹나 工曹 等의 業務에 더 能했다.
世宗은 雙頭馬車와 같은 두 사람의 性向을 考慮하여 부드러운 業務는 孟思誠에게, 邊方의 安定과 六鎭을 開拓하고 四郡을 設置하는 일은 黃喜에게 맡겼다.
🍎 牛治急氣
(소를 보고 急한 性格을 다스린다는 말로, 소의 鈍重한 行動에서 急한 性質을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 韓國儒學史에.
儒學의 嶺南學派인 曺植 (1501~1572)은 本貫은 昌寧이고, 號는 南冥이며, 諡號는 文貞이다.
曺植은 門下生들이 글을 다 마치는 畢業, 卽 卒業을 하게 되면 家畜을 한 마리씩 주었다.
後에 政丞에까지 오른 鄭擢 (1526~1605)이 畢業 後 門下를 떠나갈 때 曺植이 말했다.
“뒷間에 소 한 마리를 메어 놓았으니 몰고 가도록 해라.”
勿論 實際로 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소였다.
“자네는 氣가 세고 急하여 자칫 다칠 것이 걱정되니 行動을 소처럼 천천히 하라는 뜻이네.”
소처럼 鈍重하게 處身하여 缺陷을 矯正하라는 敎訓이었다. 훗날 鄭擢은 큰일을 當했을 때마다 마음의 소를 想起하며 處身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曺植은 中宗에 依해 參奉에 任命되었으나 應하지 않았으며, 또 明宗 때는 縣監으로 任命되었으나 亦是 固辭했다.
退溪 李滉도 書信으로 벼슬을 勸告 받고 처음에는 듣지 않았으나 尙瑞院 判官을 除授받자 宮闕에 들어가 明宗을 拜謁하였다.
그 자리에서 明宗이 出仕를 勸誘하였으나 緩曲하게 拒絶하고 山으로 돌아갔다. 그 後 또 宣祖가 벼슬을 除授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上疎만 올렸다.
南冥은 門人들에게 敬이요, 밖으로 밝은 것이 義라고 强調했다. 그리고 南冥文集에서 ‘飮食은 食財料가 없으면 만들 수 없듯, 나라를 이끄는 데는 忠臣이 없으면 다스릴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의 門下生 中에 鄭仁弘은 ‘先生은 천 길 높은 絶壁처럼 우뚝 솟은 師表였다.’고 回想했다.
曺植은 性理學者로 太極論에서 無極과 太極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또 性心論에서는 心이 모든 理를 和合하는 倉庫이며, 本原에서는 理先氣後로, 流行에서는 氣先理隨라고 말했다.
🍎 右革左草
(오른쪽은 가죽신이고, 왼쪽은 짚신이라는 말로, 오른발에는 가죽신, 왼발에는 짚신을 신었다는 뜻이다. 宣祖 때 文人 白湖 林悌가 黨派싸움을 批判한 逸話에서 由來했다. 人間의 兩面性을 꼬집을 때 쓰인다)
● 國朝人物考에.
白湖 林悌(1549~1587)는 宣祖 때의 大文章家로서 本貫은 羅州이고 號는 白湖 또는 謙薺이다. 그는 記憶力이 뛰어나 百家의 詩를 하루에 千 마디를 외워 獨寶라고도 일컬어졌다. 그는 武官 벼슬인 節度使 林晉의 아들로, 全羅道 羅州 會津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代代로 詩文에 能했으며, 뛰어난 武官도 많이 輩出하였다.
그 中에는 宣祖 때 거북선 製作에 參與했던 林忠恕, 李舜臣 將軍이 倭軍을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軍糧米를 提供했던 林懽 等 傑出한 棟梁들이 많았다. 이처럼 詩才에 뛰어났던 林悌는 少年 時節부터 勉學에 힘썼다. 그리하여 1577년 文科에 及第했는데 當時는 貴族들 사이에 權力 鬪爭이 激烈하던 때였다.
그는 科擧에 合格하기 前, 學者 牛溪 成渾의 눈에 띄었다.
“자네는 어느 家門의 子弟인가?”
名望 높은 學者에게 質問을 받았으니 예사 書生이었다면 感激하여 歡心을 사려고 家門을 높여 말했겠지만 林悌는 그런 것에 介意치 않고 謙遜하게 말했다.
“네. 저는 이름 없는 平民의 子息입니다.”
正義感이 强하고 持操가 곧았던 그는 性品이 그대로 드러나 種種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禮曹政郞으로 있을 때 東西 兩黨이 싸움을 벌이는 것을 慨嘆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山川을 周遊하였다.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外出하는데 오른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왼발에는 짚신을 신는 것이었다. 말을 끄는 馬夫가 놀라서 물었다.
“大監마님. 가죽신과 짚신은 제짝이 아닌데, 或是 술에 醉하신 것 아니십니까?”
그러자 林悌는 正色을 하며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오른쪽에서 본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고, 왼쪽에서 본 사람은 짚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누가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다고 하겠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當場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잘못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爲해서 그러느니라.”
그는 平素 黨派싸움을 甚히 慨歎스럽게 생각했는데 權力派 兩班들을 깨우쳐주고 싶어 그런 奇行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當時 得勢하고 있던 東人은 가죽신발로, 守勢에 몰려 있던 西人은 짚신으로 比喩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가 郊外에서 젊은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兩班집 子弟들답게 詩作을 즐기는 것을 보고 自己도 끼워 달라고 請했다. 行色이 초라한 모습을 보고 驕慢한 젊은이들은 ‘詩도 제대로 짓지 못할 텐데’ 하고 얕잡아 보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여 주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는 無識하여 漢詩를 지을 줄 모르니 내가 只今부터 읊는 內容을 漢字로 받아 적어 달라.’고 付託했다.
젊은이들은 林悌가 읊어가는 內容을 漢字로 받아 적고 보니 뜻과 音律이 제대로 맞는 훌륭한 漢詩였다. 젊은이들은 놀라서 물었다.
“或是 저 有名한 白湖 先生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그는 끝까지 自己 身分을 밝히지 않고 그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出言世爲狂 ~ 말을 하면 미치광이라 하고
緘口世云癡 ~ 말을 아니 하면 어리석다고 하는 世上
所以掉頭去 ~ 머리 곧추들고 가는 까닭을
豈無知者知 ~ 아는 이 어이 없으랴.
林悌는 豪放한 氣像의 文章家로 이름이 높아 李珥, 楊士彦 等이 그의 詩文을 보고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臨終할 때 子息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四夷 八蠻이 모두 自主의 나라가 되어 皇帝라 稱하는데, 唯獨 우리나라만이 中國에 매여 있으니 이 辱된 나라에 태어나서 어찌 죽음을 哀惜해 하겠느냐, 그러니 내가 죽은 뒤 哭을 하지 말아라.”
그는 花史, 秋城志, 白湖集, 浮碧樓觴詠錄 等의 著書를 남겼다
🍎 熊謹成人
(곰이 몸을 삼가 사람이 되었다는 말로, 檀君神話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에 精誠을 다하면 뜻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뜻.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과 相通하는 말이다)
● 三國遺事에.
桓因이 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人間世上을 널리 利롭게 할 만한 땅이었다. 이에 뜻이 다른 庶子 桓雄에게 天符印 세 개를 주며 내려가서 世上을 利롭게 하라고 했다. 卽 弘益人間을 闡明하였다.
桓雄은 이에 3千如 名의 무리를 거느리고 太白의 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자리를 잡으니 그곳이 곧 神市다. 그는 風伯, 雨師, 雲師를 거느리고 穀食, 壽命, 疾病, 善惡 等의 360如 가지의 일을 主管하여 人間들을 다스리기 始作했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所望했다. 桓因이 神靈한 쑥 한 쌈지와 마늘 스무 個를 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먹고 百 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謹愼하면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힘에 依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精誠과 忍耐를 보시고 恩惠를 베푸신 桓因의 뜻이니라.”
곰은 그 말대로 쑥과 마늘만 먹고 잘 참고 100날을 견디어 女子의 몸(熊女)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性質이 急하여 그러질 못하고 中途에 抛棄하였다.
사람이 된 雄女는 아름다운 女人이 되었으나 婚姻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神檀樹 아래에서 ‘저를 女子로 還生시켜 주셨으니 桓雄님이시여, 이 몸을 보살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 이에 桓雄은 暫時 사람으로 變하여 雄女와 婚姻하였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檀君王儉이었다.
檀君은 平壤城에 都邑을 定하고,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불렀다. 그 後, 다시 都邑을 白岳山의 阿斯達로 옮기고, 그곳을 弓 (或은 方<忽山>, 또는 今彌達)이라 했다. 그곳에서 一千五百 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 雄馬下葸
(수말이 새끼를 낳다. 卽 現實的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 韓國人의 民譚에.
人間의 利己的인 慾心은 끝이 없어, 萬惡의 根本이라고 한다. 바로 그런 匹夫의 이야기가 있다.
논밭 아흔아홉 筆地를 가진 富者가 한 筆地를 더 채워 百 筆地를 만들어 그 고을에서 第一가는 富者가 되려고 여러모로 窮理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求할 수 없는 求之不得이었다.
그런데 마침 주머니 속에서 物件을 꺼내듯 만만한 囊中取物이 나타났다. 같은 마을에 손발이 다 닳도록 괭이질을 하여 자갈밭 한 筆地를 일군 가난한 農夫가 그였다.
그 農夫의 자갈밭에 눈독을 들인 富者가 그를 불러 말했다.
“임자를 오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할 일도 없고 하여 심심하니 將棋나 한 板 두자는 걸세. 헌데 將棋란 내기 將棋가 아니면 재미가 없는 法이니, 진 사람은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求해오기로 하세. 萬若 그러지 못하면 代身 밭 한 筆地를 내놓든지…….”
이건 農夫의 밭을 억지로 뺏으려는 酬酌임이 뻔했지만 權勢 있는 富者의 말이라 農夫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富者의 便을 들어 訓手하는 바람에 農夫는 지고 말았다.
富者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서 말했다.
“자네가 將棋에 졌으니 來日까지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求해와야 하네. 萬若 그러하지 못하면 그 자갈밭 한 筆地를 내가 갖겠네.”
집에 돌아온 農夫는 너무나 氣가 막혀서 抑鬱하여 食飮을 全廢하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로 그렇게 傷心하시느냐고 여쭈었다.
農夫는 富者집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글쎄, 암말이 낳은 망아지라면 몰라도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어떻게 求한단 말이냐? 이젠 꼼짝없이 밭을 빼앗기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제게 좋은 方策이 있으니 너무 傷心하지 마시고 진지나 잡수십시오.”
이튿날 아침, 아들은 일찌감치 富者집을 찾아갔다. 富者는 農夫는 보이지 않고 아들만 나타나자 대뜸 물었다.
“네 애비는 왜 아직 오질 않느냐?”
그러자 農夫의 아들이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對答했다.
“어르신, 우리 집에 慶事가 났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어제 저녁에 몸을 풀어 아들을 낳았는데 글쎄 쌍둥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只今 産後調理를 하시느라고 오지 못하셨습니다.”
“예끼, 無識한 놈아!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女便네가 아이를 낳았다면 몰라도 상투 튼 男子가 어떻게 아이를 낳았단 말이냐?”
그러자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農夫의 아들이 堂차게 맞받았다.
“예. 상투 튼 男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수말이 어떻게 망아지를 낳습니까? 그러니 수말이 낳은 망아지를 求해오라고 한 어르신의 말씀이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입니다.”
富者는 어린아이에게 哭不得已笑로 아얏소리도 못하고 보기 좋게 되치기를 當해 그저 눈만 부라릴 뿐이었다.
🍎 願納錢
(스스로 願하여 바치는 돈이라는 말로, 自進해서 내는 寄附 돈을 말한다.
大院君 時節에 景福宮을 增築하기 爲해 거두어들인 돈에서 由來했다.)
● 國語大辭典, 韓國通史에
朝鮮 第26代 高宗(1852~1919)은 12歲에 卽位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興宣 大院君(1820~1898)의 攝政으로 實權이 없는 王으로 있었다.
大院君이 1865年에 景福宮을 重建할 때였다. 나라의 財政이 不足하자 大院君은 그 經費를 充當하기 爲해
富豪들로부터 거의 强制로 돈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누구도 自己 財産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자
여러 가지 妙策을 짜냈다. 卽 稅金의 이름을 뜻있는 百姓들이 스스로 願하여 돈을 낸다는 뜻으로 願納錢이라 糊塗하였다.
이에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宮을 짓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民心이 惡化되는 것을 막기 爲해서 먼저 王室에서 10萬 兩을 낸 後 富豪에게서 거두어들이는 計策을 썼다. 그리고 巨額을 納付하는 者에게는 벼슬을 주었다. 朝廷에서 대놓고 賣官賣職을 한 것이다.
이렇게 온갖 手段과 方法으로 어렵게 거두어들인 돈으로 景福宮을 建築하기 始作했으나 이듬해 火災가 나서 燒失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一萬 兩을 내는 사람에게는 常民, 所謂 常놈에게도 벼슬을 주고, 十萬 兩을 내면 守令이라는 官職을 주었다.
朝廷에서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賣官賣職을 公式的으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68年 高宗 5年에 工事가 完了되기까지 770如 萬 兩의 願納錢을 徵收했다.
이로 因한 百姓들의 怨聲이 限없이 높아지자 이를 撫摩하기 爲하여 天主敎를 彈壓하여 베르뇌(Berneux.S.F) 神父와 많은 敎徒들을 處罰하게 되었다. 그러자 France 艦隊가 仁川에까지 쳐들어와 丙寅洋擾가 일어났다.
또 大院君의 鎖國政策으로 大同江에 들어온 商船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號를 燒却한 데서 辛未洋擾가 일어났다. 이 兩亂으로 벌레가 움츠려 몸을 도사리듯 안으로 門을 걸어 잠그는 鎖國政治의 原因이 되었다.
🍎 月沙夫人
(月沙 李庭龜 大監의 夫人을 이르는 말로, 男便의 地位가 높은데도 儉素해서 他의 模範이 되는 夫人을 이른다.)
● 海東名臣錄에.
朝鮮 第14代 宣祖의 첫째 公主인 貞明公主(1603~1685) 宅에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잔치가 벌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大家집 夫人들이 저마다 權勢와 豪華스러움을 자랑하려고 많은 下人들을 거느리고 갖은 佩物과 衣裳을 갖추고서 아침 일찍부터 貞明公主 宅으로 모여들었다.
“果然 公主 宅의 잔치라서 다르구먼! 壯觀이야! 저것 좀 보아. 들어가는 夫人들마다 모두 눈이 부시잖아!”
사람들은 그 豪華로움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보게! 이番 行次는 어느 宅 夫人인가?”
“글쎄, 뉘 宅인가는 아직 모르겠네마는 漸漸 갈수록 泰山이구먼! 얼마나 더 豪奢스러워지는지 仔細히 좀 보세. 그려!”
그런데 暫時 後 아주 단출한 가마 하나가 當到했다. 그리고 가마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가는 女人은 뜻밖에도 나이가 지긋한 夫人으로 차림이 疎脫했다.
“어허, 저 늙은이는 누구기에 저렇게 수수한 차림일까?”
“必是 어느 兩班 宅의 下人일거야.”
“예끼. 이 사람! 가마 타고 다니는 下人도 있나?”
“있을 수 있지. 重要한 심부름이면 主人宅 가마를 탈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럴까? 허기사 只今까지는 저렇게 초라한 行色의 夫人이 公主 宅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니까…….”
老夫人은 수수한 무명옷에 別다른 몸治粧도 하지 않고 있었다. 六間大廳에서 搖亂스런 치마를 끌면서 豪氣를 떨던 夫人들은 보잘 것 없는 老夫人이 大門 안으로 들어서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自己네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餘念이 없었다.
그런데 그 老夫人이 섬돌 위에 오르자 主人인 公主가 크게 반기면서 맨발로 뛰어 내려와서 迎接을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다른 夫人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군거렸다.
“어느 집 老婆인데 公主께서 저렇게 맨발로 내려가 맞으실까?”
“公主媽媽도 體統을 좀 차리셔야지. 우리가 들어올 때는 大廳에도 안 나오시던 분이 저게 무슨 體貌 없으신 行動이람?”
“그렇고 말구요. 公主라는 身分도 생각하셔야지. 원 딱하기도 하셔라. 맨발로 저게 무슨 꼴이실까?”
그러나 公主는 好事家들의 입방아를 아는지 모르는지 老夫人을 윗자리에 모시고 極盡한 禮義로 飮食을 待接하는 것이었다.
“오늘 이처럼 어려운 出他를 하셨는데 飮食이 口味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시지요.”
“千萬의 말씀을 다하십니다. 平時에는 別로 나다니지 않았습니다만 公主媽媽 宅 慶事에야 어찌 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隆崇한 待接에 놀랄 뿐입니다.”
老夫人이 謙遜하게 謝禮했다.
멀리 앉아서 그 夫人의 行動擧止를 깔보던 다른 젊은 夫人들은 空然히 입을 삐죽거렸다.
隆崇한 待接을 받고 난 老夫人은 暫時 公主와 談笑를 즐기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너무 큰 歡待를 받았습니다.”
公主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직 해가 높다란데 왜 벌써 일어서세요? 더 노시다 가시지 않고…….”
老夫人이 고마움을 致辭하면서 말했다.
“우리 집 都提調(承文院, 司譯院 等 官廳의 正一品 벼슬) 大監께서 새벽에 闕內로 들어가셨고, 吏曹判書 큰 아들이 政事로 나갔으며, 둘째 아들이 承旨로 있는 것은 公主媽媽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三父子가 上監媽媽를 모시고 있는 까닭에 이 늙은이가 빨리 돌아가야만 저녁 食事를 마련하여 大闕 안으로 보내게 된답니다. 하오니 이만 下直을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옷차림이 수수하여 어느 尾官末職의 老母이거나 심부름 온 兒女子쯤으로 여기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던 젊은 夫人들은 老夫人의 뜻밖의 말에 그만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고 右往左往했다.
“그러고 보니, 저 夫人이 바로 그 月沙 李庭龜 大監의 夫人이셨구나.
난 옷차림이 너무 疎脫해서 어느 尾官의 老母인 줄로만 알았지 뭐야.”
“나도 몰랐네. 그런 줄 알았더라면 人事라도 올려 둘 것을…….”
月沙 夫人이 돌아가자 젊은 夫人들은 自己네의 지나쳤던 豪奢를 뉘우쳤다.
月沙는 明나라 經略 宋應昌의 要請으로 經書를 講義할 程度로 博識한 學者였다.
그는 蜀나라 太守가 죽자 아래와 같이 그의 碑文을 써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爲해 忠誠으로 죽고, 또 아들은 孝道를 다하여 죽으니,
마땅히 죽을 곳에서 죽었도다.’
碑文을 본 蜀나라 사람들이 크게 感動하여 謝例로 緋緞 한 수레와 黃金 百 兩을 주었다.
이 所聞이 國內에까지 퍼지자 나라 안의 稱頌이 藉藉했다. 그의 이런 行跡에는 보이지 않게 뒤에서 內助한 그의 夫人의 功이 컸다.
그래서 月沙 夫人의 功이 月沙를 만들었다는 말로 月沙夫人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 爲氣得官
(氣勢를 부려 벼슬을 얻다. 大院君에게 豪氣를 부려 禁衛大將에 오른 李章濂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男子는 마땅히 氣槪가 있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 日省錄, 高宗記事에.
興宣 大院君(1820~1898)이 失權하여 放浪하고 있을 때, 妓生 春紅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禁軍別將 李章濂 (1821~?)과 言爭이 붙었다.
李章濂은 매우 거친 言辭로 덤볐다. 그도 그럴 것이 李章濂은 相當한 軍職에 올라 있었고, 相對方은 沒落한 王族으로 市井雜輩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는 閑良이었으니 可笑롭게 보였던 것이다.
大院君은 憤痛을 터뜨리며 一個 軍職에 있는 者가 敢히 宗親에게 無禮하게 덤빌 수 있느냐면서 나무랐다. 그러자 李章濂이 大院君의 뺨을 후려갈기며 호통을 쳤다.
“그래, 當身 말대로 한 나라의 宗親이 妓生집에나 드나들면서 王室의 體統을 더럽히고 있으니, 나라를 사랑하는 뜻에서 내가 주먹으로 當身을 다스리는 것이오.”
이에 大院君은 말문이 막혀 아무 소리 못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그 後 大院君이 執權해서 雲峴宮 門턱이 大闕 門턱만큼 높아졌을 때, 李章濂을 불러들였다. 李章濂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자리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大院君은 李章濂이 들어오자 대뜸 물었다.
“이 자리에서도 나의 뺨을 칠 수 있겠는가?”
李章濂도 凡人과는 다른 豪快한 丈夫여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對答했다.
“只今이라도 媽媽께서 그때 그 자리에서 했던 것처럼 그런 言行을 하시면 小生의 손은 如前히 制裁를 加할 것입니다.”
大院君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日間 春紅의 집에 다시 한 番 갈까 했더니 자네가 무서워서 못 가겠구먼.”
그러고 나서 李章濂이 물러갈 때 大院君은 下人에게 命令했다.
“여봐라! 禁衛大將께서 나가시니 앞을 물리어라.”
그날로 李章濂은 禁衛大將으로 任命된 것이다.
🍎 爲民名判
(權力에 屈하지 않고 百姓을 爲해서 名判決을 내렸다는 말로, 外壓에 屈하지 않고 正義에 立脚하여 내리는 判決을 이른다.)
● 牧民心書에
朝鮮 第21代 英祖 때 權欕 (1729~1801)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漢城判尹을 거쳐 兵曹判書를 지냈는데, 威勢에 屈하지 않고 바르게 裁判하기로 有名했다. 權欕은 매우 頑固하여 李承薰, 丁若鏞 等 天主敎 信者에 對해 極刑을 主張했다.
그가 只今의 서울市長 格인 漢城判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當時 御醫였던 康命吉이라는 者가 王의 寵愛를 믿고 거들먹거리며 설쳤다. 그래서 그의 所行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康命吉은 西門 밖 郊外에 땅을 사들여 自己 父母의 무덤을 그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 山 아래에는 오래된 民家 數十 戶가 있었다. 그는 이 집들마저 사들인 後 秋收가 끝나면 모두 집을 비우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凶年이 들어서 그곳 住民들은 집을 비우고 나갈 形便이 못되었다. 그러자 康命吉은 그들을 쫓아내기 爲해 漢城部에 告訴하였다.
權欕은 百姓들의 딱한 事情을 듣고 그를 許諾하지 않았다.
그러자 康命吉은 王에게 付託했고, 그를 寵愛하던 王은 承旨를 시켜 權欕에게 그곳 住民들을 쫓아내도록 指示하였다. 그러나 權欕은 如前히 굽히지 않고 以前처럼 判決하였다.
그러자 王은 크게 怒하여 承旨를 불러 일이 指示한 대로 되지 않은 것을 問責하였다. 承旨가 權欕에게 王의 怒여움을 傳하자 權欕이 말했다.
“百姓들은 只今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데 그런 事情을 考慮하지 않고 쫓아낸다면 머지않아 길거리에서 모두 얼어 죽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罰을 받을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怨望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權欕이 危殆로운 地境에 빠질 거라고 念慮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 王이 權欕을 불러 稱讚했다.
“내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대의 處事가 옳았다. 그대는 참으로 忠直한 사람이다.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權欕은 그 말을 듣고 우리 陛下는 亦是 萬人之上이라고 생각하였다.
🍎 爲愛投金
(兄弟의 義를 爲하여 金을 버린다는 말로, 漁夫 兄弟가 金덩어리를 주웠으나 兄弟間의 友愛가 끊길 것을 念慮하여 金덩어리를 버린 故事에서 由來했다. 至極한 兄弟愛를 稱頌할 때 쓴다.)
● 韓國傳來童話에.
漢江 楊花大橋 附近 孔巖津 나루터에서 義좋은 兄弟가 배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어느 날, 그물을 걷어 올리니 고기는 없고 커다란 金덩어리 하나가 나왔다. 깜짝 놀란 兄弟는 金덩어리를 보고 좋아했다. 그런 기쁨도 暫時 어떻게 處理할까 망설이지 않은 수 없었다.
아우가 먼저 말했다.
“兄님은 食率들이 많으시니 兄님이 가지시지요.”
그러자 兄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냐! 너도 이제 丈家들 나이가 되었으니 네가 가져가 丈家 밑천으로 삼으려무나.”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兄弟는 結局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合議를 했다. 그런데 般으로 쪼갠 金덩이를 가지고 돌아가던 아우가 갑자기 그 金덩이를 江물에 던져버렸다.
兄이 疑阿해서 왜 그러느냐고 묻자 同生이 말했다.
“見物生心이라고 金덩이를 보니 兄님이 없었더라면 제가 통째로 가질 수 있었을 거라는 邪惡한 마음이 자꾸 들어 마음을 비우려고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도 그래서 괴롭구나. 차라리 이 金덩이가 없는 것이 좋겠다.”
兄弟는 金덩이를 未練 없이 江물에 던져버리고 나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 爲義還子
(옳음을 爲하여 子息을 바꾸다. 死六臣의 한 사람인 朴彭年의 子孫에 얽힌 故事에서 由來했다. 大義를 委하여 私事로움을 抛棄한다는 뜻이다)
● 韓國人物志에
朴彭年(1417~1456)은 第6代 端宗 때의 文臣으로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本貫은 順天이고, 號는 醉琴軒, 字는 仁叟이며, 諡號는 忠正이다.
그는 世宗의 遺命을 받아 皇甫仁과 더불어 文宗을 輔弼했다. 文宗이 죽자 端宗을 도와 忠淸道 觀察使가 되었다. 그는 首陽大君이 皇甫仁, 金宗瑞, 安平大君을 죽이고 王位를 簒奪하자 이를 逆謀로 斷定하고 復位運動을 展開했다. 李塏, 河緯地, 柳誠源, 成三問, 兪應孚, 金礩 等이 復位를 꾀하다가 金礩의 密告로 綻露나고 말았다. 그래서 世祖로부터 朴彭年의 아들 朴憲, 朴珣과 同生 朴奮, 그리고 父親 朴仲林까지 여덟 사람이 處刑을 當했다. 이들은 七日 만에 그야말로 一瀉千里로 處刑當했는데 以後 中宗 때 朴彭年, 成三問, 李塏, 河緯地, 柳誠源, 兪應孚 等은 死六臣으로 記錄되었다.
그런데 그 中 朴彭年의 아들 朴珣의 아내 李氏는 官婢가 되어 겨우 살아남았다. 그 女는 姙娠 中이어서 遺腹子로 아들을 낳으니, 그 어린 아이도 祖父의 罪에 連坐되어 死刑을 當할 危機에 處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忠僕인 女子 종이 마침 딸을 낳자 그 딸을 代身 死刑當하게 하고, 朴珣의 아들을 自己가 길렀다. 이는 俯仰不愧로 하늘을 우러러 봐도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울 게 없는 참으로 壯한 일이었다.
그 뒤 第9代 成宗 때 李克均이 嶺男觀察使가 되어 이 事實을 알고 朝廷에 自首하게 하여 容恕를 받아 이름을 朴壹珊이라 했다. 이렇게 하여 忠臣 朴彭年의 血統은 多幸히 끊기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
🍎 爲忠違孝
(나라에 忠誠을 하려 하니 父母에게 孝道를 못하게 된다는 말로, 亂世의 어지러움으로 子息의 罪에 아버지가 連坐되어 있는 立場을 뜻한다)
● 大東奇聞에.
朝鮮 第4代 世宗이 죽고 1450年 文宗이 卽位하였다. 文宗이 2年 3個月 만에 죽자 12歲의 어린 端宗이 王位에 올랐다. 首陽大君은 어린 王을 輔弼한다는 名目으로 政治權에 뛰어들었고 癸酉靖亂을 일으켜 朝廷을 手中에 넣었다.
그리고 宗親과 宮人 및 臣下들을 罪人으로 몰아 流配시키자 端宗은 危險을 느끼고 王位를 내놓고 물러나 壽康宮으로 옮겼다.
1457年 9月 朴彭年이 成三問, 河緯地, 柳誠源, 李塏, 兪應孚 等과 隱密히 端宗의 復位를 計劃했다. 그러나 金礩의 密告로 綻露나서 世祖가 親히 鞫問에 臨하게 되었다. 朴彭年의 才주를 아끼던 世祖가 물었다.
“只今이라도 나에게 돌아온다면 살려 주겠소.”
그러나 그는 斷乎히 拒絶했다. 그는 모진 拷問 끝에 父親 朴仲林과 함께 刑場으로 끌려가면서, 子息의 罪에 아버지가 連坐된 것이 罪悚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임금에게 忠誠을 하려고 하니 父母님께는 이처럼 큰 不孝가 되었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다! 네가 섬기는 임금에게 忠誠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不孝이니라.”
훗날 그는 그런 忠誠心이 認定되어 吏曹判書에 追贈되었다.
端宗은 肅宗 7年 1681年에 魯山君으로 追封되고, 1698年 端宗으로 復位되었다. 陵은 江原道 寧越에 있다.
士類 中에는 首陽大君의 悖倫에 憤慨하여 숨어서 廢人처럼 산 사람도 있다. 바로 生六臣, 卽 金時習, 元昊, 李孟專, 趙旅, 成聃壽, 南孝溫이다.
🍎 爲孝佛寬
(孝道를 爲한 일은 釋迦도 容恕한다. 高麗時代의 孝子 釋珠 스님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孝道는 그 어떤 일보다 큰 德目이라는 것을 强調한 말이다.)
● 佛敎大辭典에.
釋珠(1146~1183)는 高麗 第11代 文宗 (1019~1083) 때 스님으로 孝誠이 至極했다.
그는 佛心이 두터워서 入山한 것이 아니라 家庭 形便이 너무나 어려워서 糊口之策으로 집을 떠나 入山하게 되었다.
그는 童子僧 時節, 生前의 父母님 모습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처님에 對한 믿음이 强해지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더욱더 佛經 工夫에 邁進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父母님에 對한 그리움은 더해만 갔다. 하여 그리움을 잊기 위해 父母님의 모습을 나무에 彫刻하기 始作했다. 彫刻에 對해 아무런 知識이 없는 그였지만 一心으로 精誠을 다해 父母님의 形像을 만들어 갔다.
그는 처음 얼굴을 彫刻할 때 코는 크게 해서 다듬어 들어가고, 눈은 적게 해서 漸漸 纖細하게 다듬어서 드디어 父母의 모습을 再現 해냈다. 그리고 平素 父母님이 즐겨 입으시던 옷 色깔로 彩色하였다. 그는 完成된 父母님 彫刻像을 自己의 房 선盤 위에 따로 모셔놓고 마치 살아계신 父母님을 對하듯 精誠껏 拜禮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너는 俗世의 因緣을 끊고 釋迦에게 歸依한 比丘가 아니냐? 그런데 돌아가신 父母님을 그토록 못잊어 하니 안타깝도다. 그 至極한 孝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佛弟子는 부처님께 精誠을 바치는 일이 더 于先되어야 하느니라.”
“스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계시는 父母님을 어떻게 내쫓는단 말입니까? 벌써 20如 年이 지났지만 父母님의 모습이 하루도 잊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近者에는 더욱 사무쳐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父母님 像을 새겨 問安을 드리고 拜禮를 했더니 마음이 조금씩 安定되는 듯합니다. 저도 부처님을 모시는 절에서 父母님의 形像을 모시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後漢의 丁蘭이라는 사람도 너처럼 父母의 像을 새겨서 모셔놓고 朝夕으로 問安드리고, 밖에 나갈 때에는 ‘어디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또 돌아왔을 때에는 ‘다녀왔습니다.’ 하고 問安을 드렸느니라. 그런데 그의 아내는 男便의 그런 모습이 싫어서 男便이 없을 때 바늘로 그 媤아버지 像의 손가락을 찌르니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런 그날 밤, 丁蘭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그날 낮에 있었던 아내의 所行을 일러 주었단다. 그래서 火가 난 丁蘭은 自己 아내를 내좇아 버렸는데 사람들은 그런 丁蘭을 일러 하늘이 낸 孝子라고 했다. 너 또한 그에 못지않은 孝子로구나, 이제부터는 每年 忌日에 맞추어 追慕하되 부처님을 섬기는 일 또한 疎忽함이 없도록 하여라!”
“예, 잘 알겠습니다.”
釋珠는 스님의 말씀대로 山 너머에 草堂을 짓고 父母님의 像을 모신 다음 부처님께 供養을 올리고 나면 草堂으로 달려가 父母님께도 問安을 드렸다.
釋珠의 이 같은 孝心은 마침내 文宗에게까지 알려졌다.
“오, 갸륵한지고. 釋珠의 孝가 丁蘭의 孝에 뒤지지 않는도다.”
文宗은 釋珠에게 厚한 賞을 내리고 稱讚했다.
그 後부터 文宗은 罪人에게도 父母가 있을 時에는 刑을 免케 하여 父母를 奉養케 해주었다.
🍎 庾信之馬
(庾信의 말이라는 말로, 主人을 爲하여 忠誠을 다하였으나 本意 아니게 잘못된 境遇를 뜻한다)
● 新增東國輿地勝覽에.
金庾信(595~673)은 金首露王의 12代孫이며, 新羅 第24代 眞興王 때 勇猛을 떨친 將軍으로 三國統一에 寄與한 功이 크다. 그는 10代에 걸쳐 491年을 이어온 金官伽倻의 마지막 王인 仇衡王 (521~532)의 後孫이다.
庾信은 舒玄을 아버지로, 萬明 夫人을 어머니로 하여 眞平王 17年인 西紀595年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聰明과 슬기로운 어머니의 指導로 15歲에 花郞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萬明 夫人은 아들에게 늘 正直하고 勇敢하라고 가르쳤다. 庾信은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겨 언제나 올바르게 處身했지만 어쩌다 天官이라는 妓生과 가까워졌다.
豪宕한 金庾信은 天官의 美貌와 노래에 빠져 每日 그 女를 찾아가 밤이 깊도록 사랑을 속삭였다. 이를 알게 된 萬明 夫人이 아들을 불러 말했다.
“너는 後日 大成할 人物인데 靑樓에서 淫蕩한 生活만 하고 있으니 그래서야 쓰겠느냐? 나는 늙어 죽기 前에 너의 훌륭한 모습을 보고 싶다.”
庾信은 잘못을 크게 깨닫고 다시는 天官의 집에 드나들지 않기로 決心했다.
어느 날, 庾信이 親舊들과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醉하여 말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깜빡 졸았다. 말은 庾信이 平素에 자주 다니던 길에 익숙해져 있어 妓生 天官의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庾信은 말이 멈추기에 눈을 떠보니 天官의 집이었다.
天官은 애타게 기다리던 金庾信이 오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맨발로 뛰어나와 반겼다.
庾信은 唐慌했다.
“아차. 내가 조는 사이에 말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구나. 그러면 안 되지.”
庾信은 天官에게 自己의 意志를 보여주고자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 말은 붉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庾信은 天官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天官은 庾信이 斷乎해지자 怨望스러운 마음을 달래고자 스님이 되었다.
只今도 慶州에서 五陵 東쪽으로 가면 그 女를 기리기 爲해 세워진 天官寺라는 절이 있다.
🍎 輪言漸腫
(말은 굴릴수록 漸漸 부풀려진다. 卽 헛所聞은 입에서 입으로 퍼질수록 부풀려진다는 뜻이다)
● 吳尙源 寓話에.
장끼 꿩이 어린 새끼들을 모아놓고 이것저것 타일렀다.
“얘들아, 첫눈이 내렸으니 이제부터 恪別히 操心들 해야 한다. 눈이 내리기 前에는 아무리 숲 속을 쏘다녀도 발자국이 남지 않았지만 인제는 어디를 가도 눈 위에 발자국이 남게 된단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잡으려고 毒이 든 먹이를 놓아두거나 덫을 치거나 사냥꾼들이 몰려올 것이다.”
“사냥꾼이 뭔데요?”
“응, 숲 속에 사는 짐승들이나 우리들 날짐승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지, 그들은 아주 냄새를 잘 맡는 개를 거느리고 銃을 갖고 다닌단다.”
“銃이 뭔데요?”
“응, 그것은 쇠구슬을 火藥으로 쏘는 機械인데 아무리 재빨리 逃亡치려 해도 銃 앞엔 當할 수가 없단다. ‘꽝’ 하고 터지는 瞬間에 그 銃彈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게 된단다.”
“언제 사냥꾼들이 몰려오는데요?”
“이제 곧 두 셋씩 떼를 지어 몰려와서 이 山속이 떠나갈 듯이 銃질들을 해댈 것이다.
이때 그 近方을 지나가던 토끼가 장끼 食口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헐레벌떡 달려가기 始作했다. 그러자 노루가 물었다.
“어이, 토끼! 무슨 큰 變이라도 생겼나?”
“큰 變이고말고요. 銃을 든 사냥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 누가 그러던가?”
“네, 저 밑 콩밭 위에 있는 오솔바위 곁에서 장끼 아저씨가 꼬마들더러 빨리 避해야 한다고 서두르고 있었어요. 숲 속이 떠나가게 銃질이 始作될 거래요.”
노루도 깜짝 놀라 어린것들이 남아 있는 깊은 바위 숲 쪽으로 달리기 始作했다.
“아니, 노루 兩班, 무슨 變故라도 생겼소? 숨이 하늘에 닿게 쫓아가고 있으니 말야.”
어린 것들을 거느리고 溪谷 쪽으로 내려오던 멧돼지가 물었다.
“멧돼지 兩班,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네. 첫눈이 내리자마자 四方에서 사냥꾼들이 이 숲 속으로 올라오고 있다지 않나.”
노루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그래? 그럼 사냥꾼들을 누가 直接 봤다던가?”
“토끼가 하는 말이 저 콩밭 위 오솔바위 쪽에서 장끼네 食口가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것을 봤다는 거야. 꽝꽝 銃소리도 들렸다나 봐.”
“큰일났군, 이 어린 것들을 어쩌지, 아까 저 아래 숲 속에서 尋常치 않은 爆音 같은 게 들리는가 싶었는데 바로 그게 사냥꾼들의 銃소리 였구먼.”
멧돼지는 새끼들을 재촉하며 山허리를 타고 急히 올라갔다.
山허리를 넘어설 즈음에 어슬렁거리고 내려오는 곰과 마주쳤다.
“아니, 왜 이렇게 부산을 떠나? 누가 자네의 새끼들에게 몹쓸 짓이라도 했나?”
“곰 親舊, 말도 말게. 사냥꾼들이 只今 四方에서 이 숲을 에워싸고 몰려 올라오고 있다지 않나.”
“누가 그러던가?”
“긴말할 사이 없네. 저 콩밭 위 잔솔바위에서 장끼 食口들이 사냥꾼들의 銃에 當했다지 않나!”
그 말을 듣자 곰도 깜짝 놀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곰은 헐레벌떡 둔한 몸집을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그때에 새끼들을 거느리고 山 위로 올라오던 장끼 食口가 곰과 마주쳤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수? 곰 兩班!”
곰은 장끼 食口를 보자 自己 눈을 疑心했다. 사냥꾼 銃에 變을 當했다던 장끼 食口들이 도리어 泰然하지 않은가.
自初至終을 듣고 난 장끼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輪遞天子
(돌림 天子로, 곧 돌아가며 한 番쯤은 해먹는 天子 자리)
● 李瀷의 星湖僿說 ‘善戱謔 篇에’
朝鮮 英祖 때의 實學者 星湖 李瀷 (1681∼1763)의 文集인 星湖僿說 券 9券의 人文 ‘善戱謔 篇’에 실려 있다.
林白湖 悌는 氣槪가 豪放하여 禮法의 拘束을 받지 않았다. 그가 病이 들어 將次 죽게 되자 여러 아들들이 슬피 부르짖으니 그가 말하기를,
“四海 안의 모든 나라가 帝를 일컫지 않는 者 없는데, 唯獨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陋邦에 사는 身世로서 그 죽음을 哀惜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
하며, 命하여 哭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또 恒常 戱弄調로 하는 말이,
“내가 萬若 五代나 六朝 같은 時代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天子 쯤은 宜當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亦當爲輪遞天子).”
하였다. 그래서 한 世上의 웃음거리로 傳했었다.
林白湖悌, 氣豪不拘檢. 病將死, 諸子悲號. 林曰 "四海諸國, 未有不稱帝子, 獨我邦, 終古不能. 生於若此陋邦, 其死何足惜?" 命勿哭. 又 常戱言 "若使吾値五代六朝, 亦當爲輪遞天子" 一世傳笑
壬辰의 變亂에 이르러, 漢陰 李政丞이 明 나라 將帥 李如松을 伴接하자, 그는 漢陰의 人物을 대단히 追仰하여 甚至於는 敢히 말하지 못할 말까지 하는 것이어서, 일은 비록 眞正이 아닐지라도 亦是 스스로 便安하지 못했다.
李白沙는 詼諧를 잘하는데 어느 날 夜對 (밤에 經筵을 베푸는 일)가 있어 시골 구석의 陋한 習俗까지도 忌彈없이 다 아뢰는 것을 즐겁게 여겼으며 마침내 林 (林白湖)의 일에까지 미치자 主上은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白沙는 또 아뢰기를,
“近世에 또 웃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니 主上이,
“누구인가?”
고 묻자, 對答하기를,
“李德馨이 王의 物望에 올랐답니다.”
하여, 上은 크게 웃었다. 白沙는 이어 아뢰기를,
“聖上의 큰 德量이 아니시라면 제 놈이 어찌 敢히 天地의 사이에 容納되오리까?”
하자, 上은,
“내 어찌 가슴속에 두겠느냐?”
하고 드디어 빨리 불러오게 하여 술을 내려 주며 실컷 즐기고 罷했다.
詩經에 이르기를,
“戱謔을 잘하도다.”
하였는데 白沙가 그 才주를 지녔다 하겠다.
여기서 輪遞天子란 ‘돌림 天子’라는 뜻이니, 곧 ‘돌아가며 한 番쯤은 해먹는 天子 자리’라는 말로, 豪放한 氣像을 表現하는 말이다. 中國이 世界의 中心이라는 當時의 通念을 餘地없이 깨버리고, 우리도 中國과 같이 天子가 될 수 있다는 主體意識을 담고 있다.
🍎 鷹孵冷秋
(스산한 가을에 매가 알을 까다. 卽 매가 가을에 알을 까면 그 새끼가 추운 겨울을 無事히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에 比喩하여 愚昧한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 韓國天主敎會史에.
朝鮮 第 22代 正祖 때 領議政이자 信西派의 領袖였던 蔡濟恭 (1720~1799)은 當時 西洋에서 새롭게 流入된 天主敎에 對한 迫害를 막아주었다. 그러자 이에 맞선 攻西派는 그를 罷職하고 流配를 보내야 한다고 要求했다.
그러나 그는 正祖의 特別한 信任으로 天主敎 處理 問題를 委任받아 天主敎에 對해서 穩健 政策을 維持했다.
蔡濟恭은 어렸을 적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절에서 工夫를 했다. 그의 집은 워낙 가난(艱難)하여 철 따라 갈아입을 옷은 固辭고 食糧마저 제대로 없었다. 때문에 같이 工夫하는 名門大家의 아이들로부터 蔑視받고 따돌림 當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蔡濟恭은 조금도 氣가 꺾이지 않고 工夫만 熱心히 했다.
섣달그믐이 다가오자 한 해를 보내는 氣分에 들뜬 아이들이 各己 詩로써 感懷를 表現했다. 그런데 蔡濟恭은 그저 淡淡하게 앉아만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놀리면서 너도 詩를 한 番 지어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詩를 써내려갔다.
가을바람 스산한 枯木에 어리석은 매가 새끼를 까고
싸늘한 달, 눈 덮인 山에서는 범이 精氣를 키운다.
그 아이들 中에는 宰相의 子弟도 있었다.
宰相은 아들이 돌아오자 그날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물어 보다가 蔡濟恭이 지은 詩 이야기를 들었다. 宰相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그 아이의 詩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形便없는 詩지요. 글쎄 가을에 매가 새기를 까다니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러자 宰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헛工夫만 했구나. 그러니 그런 辱을 먹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 들어 보아라. ‘가을바람 스산한 枯木’은 머잖아 榮華를 잃게 될 權門勢家를 比喩해서 한 말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매가 새끼를 깐다.’ 고 한 것은 愚鈍한 너희들을 비웃는 말이다. 가을에 깐 새끼 매가 어떻게 겨울을 나며. 매 구실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곧 매의 새끼이긴 해도 決코 매가 되지는 못한다는 비웃음이다. 그리고 ‘싸늘한 달. 눈 덮인 山에서는 범이 精氣를 키운다.’ 고 하는 句節은 모든 苦難을 딛고 學問에만 全念하는 自己를 比喩한 것이다. 알겠느냐?”
蔡濟恭은 훗날 政治, 經濟, 文化 等 各 分野에 博識하여 國朝寶鑑의 編纂에 參與했으며 諡號는 文肅이다.
🍎 義氣求命
(義로운 氣像은 生命을 救한다. 朝鮮 英祖 때 徐有大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正義로운 일은 그 影響이 크다는 뜻으로 쓰인다.)
● 古今淸談에.
朝鮮 第21代 英祖 때 淸國의 勅使를 맞이하여 西大門 밖 慕華館에서 接賓의 禮를 올리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갑자기 돌멩이가 날아와 勅使의 이마를 때려 피가 흘렀다. 接賓官들은 크게 唐慌했다. 누군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勅使의 꼴이 괘씸하여 魂을 내주려고 한 짓이 分明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진 以上 犯人을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무렵, 慕華館 周邊에는 내로라는 閑良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 中에는 활도 잘 쏘고 힘깨나 쓰는 壯士도 여럿 있었다.
捕盜大將 宋詳은 그 中에 徐有大를 疑心하여 그를 술자리에 불렀다. 술이 몇 巡盃 돌자 宋詳이 慇懃히 誘導 質問을 했다.
“여보게! 자네도 들었지? 淸國 勅使에게 돌을 던져 보기 좋게 魂내준 일 말이야. 내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그러나 徐有大는 다소곳이 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자 宋詳은 속내를 正面으로 드러내어 물었다.
“그게 자네 짓이지?”
그러자 徐有大는 새삼스럽게 憤氣가 치솟는 듯 씩씩대며 말했다.
“아니, 그놈이 아무리 大國의 勅使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일에 지나치게 干涉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宋詳은 이렇게 하여 犯人을 잡기는 했지만 그냥 處罰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길로 重犯罪人들이 갇혀 있는 監獄으로 가서 死刑囚 한 名을 끌고 나와 말했다.
“너는 於此彼 죽을 몸 아니냐. 그러나 그냥 殺人犯으로 죽는 것보다는 無禮한 勅使에게 投石한 義로운 國事犯으로 죽는다면 네 後孫에게는 榮譽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하겠느냐?”
이렇게 說得하여 그를 投石한 罪人으로 僞裝시켜 淸國 使臣에게 데리고 가서 鄭重히 謝過하였다. 그러자 勅使가 말했다.
“이놈이 나를 다치게 한 것은 괘씸하나 제 나라에 대한 忠誠心에서 그러한 것이니 풀어 주도록 하시오.”
이렇게 하여 死刑囚는 뜻밖에 죽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捕盜大將의 슬기로운 機智로 徐有大는 勿論이고, 死刑囚 한 사람까지 살려냈으니 한꺼番에 두 목숨을 살려내는 結果가 된 것이다.
그 後, 徐有大는 出衆한 武藝를 認定받아 訓鍊大將이 되었는데, 武人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學問에도 造詣가 깊어 文武를 兼備한 큰 棟梁이 되었다. 英祖는 80歲 高齡이 넘어서도 徐有大만 보면,
“하하! 傲慢한 勅使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그 사람 아니냐!” 하면서 반가워했다
🍎 義比爲國
(個人的인 義理보다는 나라를 爲해야 한다. 卽 大義를 爲해서는 작은 일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 高麗史節要, 韓國의 人間像에.
高麗를 創建한 王建이 弓裔의 忠誠스러운 臣下로 있을 때였다.
王建이 弓裔의 命을 받아 軍士를 거느리고 貞州를 지나다가 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그곳의 아름다운 富者집 柳天弓의 딸을 보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王建은 빨래터로 내려가 말을 걸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예, 이 고을의 長者 柳天弓의 딸이옵니다.”
“나는 王建이라는 사람이오. 지나다가 그대가 하도 어여쁘기에 人事를 請한 것이오. 이제 해도 저물었는데 그대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없겠소?”
“그러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어 아버님께 여쭈어 보시옵소서.”
王建은 處女를 따라 柳天弓의 집으로 갔다. 柳天弓은 王建을 보더니 普通 사람이 아닌 것을 直感하고 그날 밤으로 딸과 짝을 지어 사위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王建은 柳씨 處女와 하룻밤을 같이 했으나, 當時에는 弓裔의 命令을 받아 後百濟와 戰爭을 하는 處地라서 좀처럼 다시 만날 機會가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柳氏 處女는 王建의 幸運도 빌고, 貞節도 지킬 兼해서 중이 되었다.
몇 해가 지나 王建이 都城으로 돌아와서 아내 柳氏를 찾았으나 그 女가 貞節을 지키려 중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곧 그 女를 데려다가 婚禮를 치렀다. 柳氏는 男便 王建을 爲해 獻身的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王建은 侍中으로 나라의 重責을 맡고 있었으나 언제나 憂鬱해했다. 理由는 弓裔의 性質이 날로 亂暴해져 忠臣은 말할 것도 없고 一家親戚마저도 自己 氣分에 거슬리면 事情없이 죽이는 等 그 橫暴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王后 康氏가 理性을 찾으라고 忠告를 했다. 弓裔는 康氏가 男便인 自己를 反對하고 다른 사람을 두둔(斗頓)하는 것은 그놈과 姦通했기 때문이라고 罪를 뒤집어 씌워 모진 拷問 끝에 죽였다. 이에 臣下들은 임금이 미쳐서 아내와 아들까지 마구 죽이는 판이니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恐怖에 휩싸였다. 그리고 끝내는 이처럼 暴惡한 임금을 그대로 섬겨야 하느냐에 對한 論議가 일게 되니 王建은 몹시 괴로웠다.
王建의 나이 42歲, 918年 6月14日 밤이었다.
王建이 거느리고 있던 武士 洪儒, 裵玄慶, 申崇謙, 卜智謙 等이 王建의 집으로 찾아왔다. 王建은 이들이 나라의 重大事를 議論하려는 것임을 알고 아내에게는 그 秘密을 감추고자 집안 食口들에게 참외를 따오라고 내보냈다.
그러나 눈치를 챈 柳氏 夫人은 참외를 따러 가는 척하고 아무도 모르게 北쪽 門으로 들어가 帳幕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果然 놀라운 이야기였다.
“只今 임금께서는 精神錯亂으로 날이 갈수록 暴惡해지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소이다. 하루 빨리 그를 쳐서 바로잡도록 합시다.”
“그렇소! 그런데 우리가 나라를 救하려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王 將軍밖에 없습니다. 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우리들의 뜻을 져버리지 마시고 王位를 이어받아 주십시오.”
여러 將軍들도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라를 救하는 길이라고 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아니 될 말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弓裔 임금의 臣下요. 臣下가 어찌 임금을 背叛할 수 있겠소. 나는 그것만은 못하겠소.”
그러자 申崇謙이 나서며 힘주어 말했다.
“將軍은 個人的인 義理만 重하고 나라는 쓰러져도 相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오? 우리가 어질고 훌륭한 임금을 背信한다면 나쁘지만 只今의 임금이 어디 사람이라 할 수 있소이까? 將軍은 아무 말 하지 마시고 우리들의 뜻을 받아 주시오. 그것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것이오.”
그러나 王建은 거듭 拒絶하였다. 그러자 帳幕 뒤에 숨어 있던 柳氏 夫人이 王建 앞으로 나아가 鄭重하고도 斷乎하게 말했다.
“나라를 爲하여 不義를 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옵니다. 少女가 듣자하오니 여러 將軍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女子인 저로서도 마땅한 일이라 생각되옵는데 하물며 將軍께서는 丈夫의 몸으로 어찌 反對만 하십니까?”
그리고 王建에게 甲옷을 입혀 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病은 제때에 고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일도 適切한 時期에 이르렀을 때 손을 써야 합니다. 때를 놓친 다음에는 後悔해도 回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부디 여러 將軍들의 뜻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夫人의 말에 勇氣를 얻은 王建은 여러 將軍들과 뜻을 모아 革命의 깃발을 들고 弓裔를 몰아낸 다음 새로운 나라, 高麗를 세우고 太祖가 되었다. 柳氏 夫人은 爵位를 神惠王后로 받고, 王建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 義死不辭
(義의로운 죽음은 辭讓하지 않는다. 卽 옳은 일을 爲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 列傳 第 8 에.
新羅의 劍君은 大舍 仇文의 아들로서 沙梁宮의 舍人으로 있었다.
眞平王 丁亥(627年) 8月, 初가을인데도 된서리가 내려 農作物이 모두 죽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부터 여름까지 큰 飢饉이 들어 百姓들이 子息을 팔아 끼니를 잇는 그야말로 慘酷한 地境에 이르렀다.
時代가 이렇게 뒤숭숭하니 自然히 腐敗가 猖獗했다. 宮中의 執事들도 例外는 아니어서 宮지기들이 모두 共謀하여 唱翳倉의 穀食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劍君은 홀로 辭讓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宮지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받는데 當身만 홀로 물리치니 무슨 까닭이오? 몫이 적어서 그런다면 더 주겠소.”
劍君이 웃으며 對答했다.
“나는 花郞의 뜰에서 風流道를 修行한 사람이니 花郞道 精神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千金이라도 받지 않겠소.”
그러자 宮지기들이 劍君을 그냥두면 禍根이 될 것이 두려워 그를 除去하고자 謀議했다.
“이 者를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秘密이 綻露 날 것이다.”
劍君은 이를 눈치 채고 親舊 近郞에게 作別人事를 했다.
“오늘 以後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오.”
近郞이 理由를 물었으나 말하지 않다가 두세 番 물은 뒤에야 마지못해 그 理由를 말했다. 近郞이 왜 官家에 告發하지 않느냐고 하자 劍君이 말했다.
“나 혼자 살자고 뭇사람이 罰을 받게 함은 人情上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다면 逃亡이라도 가시오.”
“그도 아니 되오. 저들이 그릇되고 내가 옳은데 내가 달아난다면 丈夫로서 卑劣한 짓이 되오.”
그러고 나서 그는 宮지기들에게로 갔다. 여러 宮지기들이 술을 마련하고 謝過하는 척하며 몰래 飮食에 毒藥을 넣었는데, 劍君은 알면서도 그냥 먹고 죽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말했다.
“ 劍君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죽었으니 泰山 같은 自己 목숨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다.”
그는 목숨을 던져 義를 救했던 것이다.
🍎 以笠掩天
(金삿갓에게서 由來한 말로, 부끄러운 일을 避하는 行動을 이른다.)
● 韓國諧謔小說集에.
金삿갓의 本名은 金炳淵 (1807~1863)이고, 號는 蘭皐이며, 京畿道 楊州 出身이다.
그는 竹杖에 竹笠을 쓰고 술 한 盞에 詩 한 首로 世上을 諷刺하며 三千里 坊坊曲曲을 돌아다닌 放浪 詩人이었다.
그의 祖父 金益淳은 純祖 11年(1811年), 洪景來亂 때 宣川 府使로 있었으나 亂을 鎭壓하지 못하고 되려 洪景來에게 降伏하여 무릎을 꿇은 罪로 死刑을 當했고, 나머지 家族들도 滅族시키라는 訓令이 내려졌다. 그러자 여섯 살의 어린 金炳淵은 兄 炳河와 함께 下人의 도움으로 黃海道 谷山으로 避身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赦免을 받아 江原道 寧越로 내려와 나머지 家族들과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炳淵은 나이가 들자 科擧를 보기 爲해 글工夫에 힘썼다. 그리고 20歲가 되던 해, 寧越에서 열리는 白日場에 參加했다. 나라에서 치르는 大科에 比할 바는 못 되었지만 地方 白日場도 入賞을 하면 地方의 官吏로 登用되기에 應試者들이 많았다.
그날의 詩題는 嘉山郡守 鄭蓍의 忠節과 宣川府使 金益淳의 行跡에 對해서 論하라는 것이었다.
洪景來가 叛軍을 이끌고 먼저 嘉山에 들이닥치자 嘉山郡守 鄭蓍는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最後까지 抵抗하다가 끝내 殉節했으나, 宣川府使 金益淳은 前날 過飮하여 잠에 골아 떨어져 있다가 洪景來에게 生捕되자 抵抗 한 番 하지 못하고 降伏해 버린 事實에 對해서 批判하라는 것이었다.
炳淵은 忠臣을 欽慕하는 마음과 너무 쉽게 降服해 버린 罪人을 輕蔑하는 義憤으로 그동안 갈고닦은 글 솜씨를 遺憾없이 發揮했다.
(詩題 ;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代代로 임금을 섬겨온 金益淳은 듣거라,
鄭公은 卿大夫에 不過했으나)
將軍桃李隴西落 烈士功名圖末高
(隴西의 將軍 李陵처럼 降服하지 않아,
忠臣烈士들 가운데 功과 이름이 序列 中에 으뜸이로다.)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詩人도 이에 대하여 悲憤慷慨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江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宣川은 예로부터 大將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嘉山 땅에 比하면 먼저 忠義로써 지킬 땅이로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淸明한 朝廷에 모두 한 임금의 臣下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太平歲月이던 辛未年에, 關西 地方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變故인가)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魯仲連 같은 忠臣이 없었고, 漢나라를 輔佐하는 데는 諸葛亮 같은 者 많았노라)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우리 朝廷에도 또한 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兵亂 막아 節槪 지키고 죽었도다)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늙은 官吏로서 救國의 旗幟를 든 嘉山 郡守의 名聲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太陽 같았노라)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魂은 南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岳飛와 벗하고,
뼈는 西山에 묻혔어도 伯夷의 곁이라)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西쪽에서는 매우 슬픈 消息이 들려오매,
묻노니 너는 누구의 祿을 먹는 臣下이더냐?)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家門은 으뜸가는 壯洞 金氏요, 이름은 서울에서도 떨치는 淳 字 行列이구나)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너희 家門이 이처럼 聖恩을 두터이 입었으니,
百萬 大軍 앞이라도 義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淸川江 맑은 물에 兵馬를 씻고,
鐵甕山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임금의 御殿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무릎 꿇어야지, 西쪽의 凶惡한 盜賊에게 무릎 꿇었구나)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너의 魂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地下에도 先王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이제 임금의 恩惠를 저버리고 肉親을 버렸으니,
한 番 죽음은 가볍고 萬 番 죽어야 마땅하리)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春秋筆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歷史에 記錄하여 千秋萬代에 傳하리라)
붓을 놓고 난 炳淵은 義憤에 못 이겨 긴 한숨을 吐해내고는 卷紙를 試官에게 提出했다.
그리하여 堂堂히 壯元을 차지한 炳淵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제가 壯元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炳淵이 白日場에서 金益淳을 辛辣하게 批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하기는커녕 깊은 한숨을 吐하며 말했다.
“炳淵아! 金益淳 그 어른은 바로 네 할아버지란다.”
炳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내가 萬 番 죽어 마땅하다고 辱한 그 분이 내 할아버지라니, 이럴 수가……. 이토록 얄궂은 運命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껏 배운 글才주로 내 祖上을 辱하는데 써먹다니…….”
炳淵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人生에 깊은 懷疑를 느낀 炳淵은 그때부터 집을 떠나 全國 坊坊曲曲을 定處 없이 떠돌아다니기 始作했다.
그는 自身이 祖上을 辱한 不孝子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부끄러움에 큼직한 삿갓을 쓰고 하늘을 가린 後, 竹杖에 괴나리褓짐을 지고 어머니와 妻子息을 떼어 놓은 채 山川景槪를 떠돌며 마음을 달랬다.
炳淵은 羊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九折羊腸 山길을 터벅터벅 걸어 太白山 구경을 마치고 金剛山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初入의 작은 亭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스님과 선비를 만났다. 오랫동안 말벗이 없어 입에서 군내가 날 程度가 된 炳淵이 슬그머니 선비 便을 들어 訓手를 했다. 그러자 스님이 초라한 炳淵의 行色을 보고는 핀잔을 주었다.
“여보슈! 가던 길이나 가지. 웬 訓手요?”
不快해진 炳淵이 한마디 했다.
“山은 名山인데 중은 어질지를 못하구나.”
그러자 스님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삿갓 쓴 되지못한 선비는 아름다운 山의 바위에 앉는 것조차 아깝다.”
그러자 炳淵이 뒤틀린 心思를 詩로 읊었다.
僧首圓圓汗馬閬 ~ 동글동글한 중놈 대머리는 땀 찬 말 불알이요
儒頭尖尖坐狗腎 ~ 삐쭉삐쭉한 선비 대갈통은 앉은 개 좆이로구나.
聲令銅鐘衡銅鼎 ~ 목소리는 구리방울이 구리솥에 부디치는거 같고
目若黑椒落白粥 ~ 눈瞳子는 검은 콩이 흰粥 위에 떨어진 것 같구만.
侮辱을 當한 중과 선비는 팔을 걷어붙이며 덤벼들었다.
“뭐라구, 말 불알? 이 빌어먹을 놈아, 게 섰거라.”
잽싸게 逃亡쳐 나온 炳淵이 山마루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보니 壯觀이었다. 詩 한 首가 절로 나왔다.
矗矗尖尖怪怪奇 ~ 우뚝우뚝 뾰족뾰족 怪常하고 奇異하니
人仙神佛共堪疑 ~ 사람인가 神仙인가 鬼神인가 부처인가
平生詩爲金剛惜 ~ 내 平生 金剛 爲해 詩 짓기를 아꼈건만
及到金剛不敢詩 ~ 정작 金剛 보고 나니 敢히 붓을 못 들겠다.
炳淵이 잔치판이 벌어진 어느 大家를 지나다 시장끼가 돌아 大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執事로 보이는 늙은이가 눈을 부라렸다.
“이봐! 여기가 어디라고 乞人이 함부로 들어오는 게야, 當場 나가지 못할까?”
배알이 뒤틀린 炳淵은 主人이 앉아있는 大廳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人到人家不待人 ~ 사람이 사는 집이라 찾아 왔건만 통 사람 待接을 안 하니
主人人事難爲人 ~ 主人이란 작자는 아마도 사람이 아닌게야.
炳淵은 薄待를 當하는 일이 한 두 番이 아니었는데 그 亦是 사람인지라 속이 便할 리 없었다. 그래서 돌아서 나오다가 마침 길가 오두막집 窓가에서 재재거리는 새를 보고 읊조렸다.
問爾窓前鳥 ~ 묻노니 들窓 앞에 와서 우는 새야
何山宿早來 ~ 너는 어느 山에서 자고 왔느냐
應識山中事 ~ 넌 山 消息을 잘 알겠지
杜鵑花發耶 ~ 只今 山엔 진달래꽃이 피었더냐?
어느날 明川 땅에 들었으나 人心이 너무도 고약하야 嘆息이 저절로 나왔다.
明川明川人不明 ~ 明川 明川 부르지만 사람들은 賢明치 못하고
魚佃魚佃食無魚 ~ 魚佃魚佃 자랑하지만 밥床엔 北魚 꽁댕이 하나 없구나!
人心은 사는 形便에 따라 千差萬別이지만 變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山川草木뿐이었다.
炳淵은 한 조각 구름처럼 定處없이 발길을 옮기며 竹 打令을 읊었다.
此竹彼竹化去竹 ~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 ~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生此竹 ~ 밥이면 밥, 粥이면 粥, 나오는 대로
是是非非付彼竹 ~ 옳고 그름은 따지지 말고, 그저 그런대로
賓客接待家勢竹 ~ 손님 接待는 집안 形便대로
市井賣買歲月竹 ~ 物件 사고 파는 것은 市勢대로
萬事不如吾心竹 ~ 萬事를 다 내 마음대로 못하니
然然然世過然竹 ~ 그렇고 또 그런 世上 그런대로 살아가세.
山 좋고 물 좋은 金剛山과 山間僻村을 돌던 炳淵의 발걸음이 어느덧 漢陽으로 向하여 仁王山 봉우리에 올라 城안의 빽빽한 기와지붕들을 바라보며 感懷에 젖었다. 이 밤 어느 곳에 情을 붙일까? 꿈속 같은 길을 가며 읊는다.
靑春抱妓千金芥 ~ 靑春에 妓生을 안고노니 千金이 티끌과 같고
今夜當樽萬事雲 ~ 이 밤에 술盞을 드니 萬事가 구름같도다.
鴻飛遠天易隨水 ~ 기러기가 먼하늘에 나니 물을 따르기 쉽고
蝶過靑山難避花 ~ 나비는 靑山을 지날 때 꽃을 보고 避하기 어렵네.
炳淵은 複雜한 漢陽의 저잣거리 人心이 시골 人心보다 사나운 것을 皮膚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렵사리 쉰밥 한 술을 얻어먹고 되지못한 人心을 뒤틀린 배알로 읊조렸다.
二十樹下三十客 ~ 스무 나무 아래 설흔 나그네가
四十家中五十食 ~ 亡할 놈 마을에서 쉰밥을 먹게 됐네.
人間豈有七十事 ~ 人間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不如歸家三十食 ~ 차라리 歸家하여 서러운 밥 먹겠네.
炳淵은 오랜 歲月 떠돌다 보니 구경도 좋고 流浪도 좋지만 故鄕에 있는 어머니와 妻子息이 限없이 그리워졌다.
斜陽叩立兩柴扉 ~ 夕陽 무렵 남의 집 사립문을 두드리니
三彼主人手却揮 ~ 主人은 거듭 손을 내 저으며 꺼지라 하네.
杜宇亦知風俗薄 ~ 杜鵑새도 野薄한 人心 알았음인가
隔林啼送不如歸 ~ 돌아가는 게 좋으리라고 숲에서 울어 대네.
炳淵은 祖上을 辱한 罪 때문에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렸지만 돌이켜보면 自身의 恨많은 生이 스스로 서럽기도 했다.
漸漸 自己의 삶에 그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一生의 마지막 詩 ( 漂浪一生嘆)를 남겼다.
鳥巢獸穴皆有居 ~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窟이 있는데
顧我平生獨自傷 ~ 나는 平生을 혼자 슬프게 살아 왔구나.
芒鞋竹杖路千里 ~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千 里 길을 다니며
水性雲心家四方 ~ 물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지.
尤人不可怨天難 ~ 남을 탓할 수도 하늘을 怨望할 수도 없고
歲暮悲懷餘寸腸 ~ 해마다 해가 저물면 서러운 마음에 슬퍼했다.
初年自謂得樂地 ~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漢北知吾生長鄕 ~ 漢江가 이름 있는 鄕里에서 자랐다.
簪纓先世富貴人 ~ 祖上은 富貴榮華를 누려 왔던 사람들
花柳長安名勝庄 ~ 서울 에서도 이름 높은 家門 이었다.
隣人也賀弄璋慶 ~ 이웃 사람들은 得男했다 祝賀해 주며
早晩前期冠蓋場 ~ 언젠가는 出世하리라 期待 했었다.
髮毛稍長命漸奇 ~ 자랄수록 運命이 자꾸만 崎嶇하여
灰劫殘門飜海桑 ~ 오래잖아 桑田이 碧海처럼 變했다.
依無親戚世情薄 ~ 依支할 親戚도 없고 人心도 刻薄한데
哭盡爺孃家事荒 ~ 父母마져 돌아가셔 집안이 荒廢化되었다 .
終南曉鍾一納履 ~ 새벽 鐘소리 들으며 放浪길에 오르니
風土東邦心細量 ~ 生疎한 客地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心猶異域首丘狐 ~ 마음은 故鄕 그리는 떠돌이 여우 같고
勢亦窮途觸藩羊 ~ 身世는 窮地에 몰린 울에 걸린 羊이었다.
南州從古過客多 ~ 南쪽 地方은 自古로 過客이 많은 곳
轉蓬浮萍經幾霜 ~ 浮萍草 처럼 떠돌기가 그 몇 해던가.
搖頭行勢豈本習 ~ 머리 굽실거림이 어찌 내 本性이리오
糊口圖生惟所長 ~ 먹고 살아가기 爲해 버릇이 되었도다.
光陰漸向此中失 ~ 그런 中에도 歲月은 속절없이 흘러가
三角靑山何渺茫 ~ 三角山 푸른 모습 생각 할 수록 아득하네.
江山乞號慣千門 ~ 떠돌며 求乞한 집 數없이 많았으나
風月行裝空一囊 ~ 風月을 읊는 舍廊房은 언제나 비었도다.
千金之子萬石君 ~ 큰 富者 작은 富者 고루 찾아다니며
厚薄家風均試嘗 ~ 厚하고 薄한 家風 모조리 맛보았노라.
身窮每遇俗眼白 ~ 身世가 崎嶇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歲去偏傷빈髮蒼 ~ 흐르는 歲月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歸兮亦難佇亦難 ~ 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무르기 또한 어려워
幾日彷徨中路傍 ~ 路上에서 彷徨한 날이 그 얼마 였던가.
炳淵은 裕福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한때 放心한 탓으로 崎嶇한 八字가 되어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고 삿갓을 눌러쓴 채 諷刺와 諧謔의 詩를 읊으며 한 時代를 悲運의 그늘에 가려져 살아야 했었다.
🍎 理埋毒肉
(毒이 든 고기를 파묻다. 宣祖 때의 文臣 洪瑞鳳의 어머니에게서 由來한 말로, 다른 사람의 被害를 念慮하여 그 素地를 없애는 行爲를 이른다)
● 海東續小學에.
朝鮮 第14代 宣祖 때의 文臣 洪瑞鳳 (1572~1645)의 號는 鶴谷이며, 諡號는 文靖公이다. 그는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崔鳴吉과 함께 和議를 主張하였다. 洪瑞鳳은 仁祖反政 後 吏曹判書를 거쳐 右議政에 이르렀으며 性格이 穩和하여 누구와도 和樂했다. 丙子胡亂 때는 昭顯世子와 鳳林大君과 함께 沈陽에 갔다 오기도 했다.
洪瑞鳳은 文章과 글씨에도 能했지만 生活은 아주 儉素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변변치 않은 飮食을 먹으며 어렵게 지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는 下人을 보내 고기를 사오게 하였는데, 사온 고기가 모두 傷해 있었다. 그래서 그 下人에게 물었다.
“사온 것과 같은 고기가 얼마나 더 있더냐?”
下人이 얼마쯤 되더라고 하자 그 女는 卽時 머리 粧飾品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그 고기를 다 사오게 하고선 담장 밑에 묻었다. 다른 사람이 그 고기를 먹고 病이 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消息을 들은 瑞鳳이 말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이 可히 天地神明과 通할만하니 子孫들이 반드시 繁昌할 것입니다.”
그때 昭顯世子가 갑자기 別世하자 王室에서는 鳳林大君을 世子로 冊封하려 했다. 洪瑞鳳은 이에 反對하고 昭顯世子의 아들을 世子로 冊封할 것을 主張했으나 貫徹되지 못했다.
靑丘永言에 收錄된 詩 한 首 옮겨 그 心境을 들여 다 본다.
離別하던 날에 피눈물이 난지 만지
鴨綠江 내린 물 푸른빛이 全혀 없네.
배 우희 허여 센 沙工도 처음 봐라 하더라.
풀이하면, ‘서울을 떠나 沈陽으로 가던 날 피눈물이 났는지 어떤지 조차 모를 程度로 景況이 없고 보니 배를 타고 건너는 鴨綠江 물도 피눈물과 범벅이 되어 푸른빛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배 위의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沙工도 一國의 世子가 오랑캐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더라.’ 라는 뜻이다.
洪瑞鳳이 나라를 걱정하듯 洪瑞鳳의 어머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겼던 어머니였다.
🍎 李武膽量
(李武의 배짱이라는 말로, 朝鮮 孝宗 때 宋時烈과 防禦使 李武 사이에 있었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를 認定하면 自身이 크게 不利해지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배짱을 말한다.)
● 古今淸談에.
朝鮮時代, 朱子學의 大家이며 左議政을 지냈던 尤庵 宋時烈 (1607~1689)이 隱退하여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하루는 나귀를 타고 下人과 함께 酒幕에 들어갔다. 그때 새로운 任地로 赴任하는 防禦使 李武가 部下들을 이끌고 뒤따라 들어왔다.
“비켜라! 防禦使 어른이시다.”
큰소리로 외치며 우르르 들어오는 그들의 氣勢에 宋 大監과 下人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火가 난 宋 大監의 下人이 그들을 向해 소리쳤다.
“無嚴하도다, 이 어른이 바로 宋時烈 大監이시다. 그런데 敢히 無禮하게 군단 말이냐?”
軍卒들은 卽時 防禦使 李武에게 下人의 말을 傳하였다.
“큰일 났구나, 그 어른을 몰라보고 放恣하게 굴었으니…….”
防禦使는 덜컥 怯이 났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暫時 窮理를 하다가 宋 大監 앞으로 가서 防禦使로서의 威嚴을 갖추고 말하였다.
“老人은 누구시오?”
宋 大監의 下人은 防禦使의 倨慢한 態度에 어이가 없었다. 한낱 軍官의 身分으로 左議政을 지낸 어른에 對한 無禮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바로 宋時烈이오.”
“뭐? 當身이 宋時烈이라고? 나이만 든 게 아니라 妄靈까지 들었군.”
“예끼, 이 사람! 젊은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險하게 하시오.”
“그게 아니라면 老人은 怯도 없소? 敢히 宋時烈 大監을 함부로 詐稱하다니, 當身 단단히 魂 좀 나야 되겠소. 이 나라의 第一가는 어른을 戱弄하다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요?”
“조용히 말할 때 물러가시오, 그렇게 아무데서나 宋 大監 어른을 詐稱하고 돌아다니다가는 제 命에 죽지 못할 것이오, 아시겠소?”
宋 大監은 어처구니없는 逢變을 當하고 軍卒들에게 떠밀려 酒幕을 나왔다.
“ 大監님, 當場 官家에 알려서 저놈들을 魂내야 됩니다.”
“그럴 거 없다. 그 防禦使가 나를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逢變을 當하긴 했지만 그 防禦使의 機智와 배짱은 높이 살만하다. 後에 내가 緊히 써야 할 人物이니라.”
宋時烈 大監은 逢變을 當하고도 흐뭇한 微笑를 지으며 다른 酒幕으로 가서 머물렀다.
🍎 以文放父
(글로써 아버지를 풀려나게 하다. 朝鮮 成宗 때 金虯라는 어린아이가 監獄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救한 故事에서 由來했다. 特技로써 어떤 일을 成事시키는 것을 이른다.)
● 國朝人物考에.
金虯(1521~1565)는 朝鮮 第13代 明宗 때 사람으로, 本貫은 光州요, 號는 灘叟이며, 벼슬은 典翰을 지냈다.
어느 해, 甚한 가뭄이 들어 明宗이 直接 祈雨祭를 올리고 있는데 갑짜기 風樂 소리가 들렸다. 괘씸하게 여긴 明宗이 뉘 집에서 나는 風樂 소리인지 알아오게 했다.
“監察 金世愚라는 者가 잔치를 베풀고 있다 하옵니다.”
明宗이 震怒하여 命을 내렸다.
“가뭄으로 百姓들이 塗炭에 빠져 朕도 饌까지 줄이며 操心하고 있는데 國祿을 먹고 있는 者들이 어찌 그리 放恣하단 말이냐? 當場 잡아다 罪를 묻도록 하라!”
御命이 떨어지자 잔칫집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니, 모두 13名이나 되었다.
그러자 金世愚의 아들과 同生들이 金世愚의 容恕를 哀願하는 上疎文을 올렸다. 明宗은 自身의 잘못은 모르고 어린 아들과 同生을 시켜 上疎하게 하였음이 더욱 괘씸하여 아들과 同生까지 잡아 가두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家族들이 모두 怯이 나서 멀리 달아났는데 어린 아들 金虯만이 남아 있다가 잡혀 왔다. 明宗이 물었다.
“너는 왜 逃亡가지 아니했느냐?”
“아버지의 목숨이 걸렸는데 子息된 者의 道理로 어찌 逃亡가겠습니까?”
“이 上疏文은 누가 지었느냐?”
“제가 지었습니다.”
“누가 썼느냐?”
“제가 썼습니다.”
“네 나이는 몇이냐?”
“예, 열세 살입니다.”
“어린 네가 어찌 글을 이처럼 잘 짓고, 잘 쓸 수 있단 말이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예, 分明 제 손으로 쓴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한 番 試驗하여 주십시오.”
明宗은 그에게 글을 짓고 쓰도록 命하였다. 그는 곧 거침없이 글을 지었는데, 글 끝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千 里에 비가 촉촉이 내리니 聖王께서 百姓을 생각하는 거룩한 마음인가 합니다.”
明宗은 그 才주에 感嘆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다.
“嘉尙하도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金虯라고 합니다.”
“너는 어린 나이인데도 文章에 能하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너의 文章을 보고 네 아비를 釋放하고, 글씨를 보아 다른 사람들까지 놓아 주겠다. 네 아비에게 至極한 孝誠을 보이듯이 나라에도 忠誠을 다하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金世愚와 그 同僚를 釋放토록 해주었다.
金虯는 東萊 宣慰使를 職務하던 中 尹元衡 一派의 誣告로 慶源에 流配되었다가 1564年에 풀려나 掌樂院正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지 않고 禮山에서 죽었다.
🍎 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傳하다. 言語나 文字를 媒介로 하지 않고 깨달음을 느낌으로 傳한다는 意味로 쓰인다)
● 禪門拈頌에.
以心傳心은 禪宗에서 깨달음의 極한 뜻을 傳하는 것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傳達하는 心心相印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拈華示衆, 拈華微笑, 三處傳心 等이 있다.
釋迦牟尼가 摩갈(楊)陀國 靈鷲山에서 여러 弟子들을 모아 놓고 法을 說하던 中 꽃을 들어 大衆에게 보였다. 弟子들이 自信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보기 爲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釋迦牟尼의 뜻을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大伽葉(섭)만이 뜻을 알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자 釋迦牟尼는 伽葉에게 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等 佛敎의 眞理를 傳해 주었다.
여기의 敎外別傳이란 敎理 外 다른 가르침을 말하며, 不立文字란 眞理는 文字로 表現할 수 없다는 뜻이다. 以心傳心은 우리 歷史와는 相關이 없지만 日常生活에 많이 쓰이는 佛敎用語이다.
🍎 耳言致富
(귓속말로 돈을 벌다. 興宣 大院君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地位가 높은 사람에게 阿附하여 願하는 것을 獲得하는 境遇를 이른다)
● 梅泉野錄에.
興宣 大院君(1820~1898)의 字는 時伯이고, 號는 石坡이다. 興宣君은 政權을 잡기 前 安東 金氏의 勢道 밑에서 살아남기 爲하여 破落戶 行勢를 하며 宮道令으로 歲月을 보냈다. 그러다가 後嗣가 없던 哲宗의 後任으로 自身의 둘째 아들 命福이 高宗으로 卽位하자 하루 아침에 大院君이 되었다. 그 後 攝政을 通하여 많은 改革과 果敢한 政治를 하여 그 治績이 컸다. 反面에 鎖國政策을 끝내 固執함으로써 나라를 國際的으로 孤立시킨 것은 그의 失政이었다.
그는 外戚의 牙城인 安東 金氏의 主流를 肅淸하는 한편 黨色을 超越하여 人才를 登用했다. 그리고 腐敗한 官吏를 摘發하여 罷職시키고, 法律制度의 確立을 通해 中央執權 政治의 紀綱을 確立했다.
그가 權力이 集中되는 자리에 있게 되자 그에게 阿諂하는 者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 中에 옛날 妓房에서 大院君을 몹시 괴롭히던 安東 金氏 한 사람이 찾아와 발아래 엎드려 그동안 잘못했노라고 싹싹 빌었다. 그러자 大院君은 그를 容恕함은 勿論이고, 뜻밖에도 所願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小人이 每日 찾아뵙고 問安을 드릴 것이오니 그때마다 제가 大監님의 귀에 귓속말 세 마디씩만 하게 하여 주십시오.’ 했다. 大院君은 ‘그놈 別난 請을 다 하는구나.’ 생각하고 快히 承諾하였다.
이튿날부터 그 者는 꼭 雲峴宮에 손님이 많이 있을 때에만 들어와서 大院君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나 정작 別로 特別한 內容이 없었으므로 大院君이 適當히 대꾸하면 그者는 正色을 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그럴 수야 있습니까?”
또 어떤 때는 이렇게 말했다.
“最善을 다하여 吩咐 받들겠습니다.”
그곳에 있던 여러 손님들은 그 光景에 모두 깜짝 놀랐다. 當時 大院君 앞에서 敢히 ‘안 됩니다.’ 라고 對答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注目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者와 가까이 하고자 그 집은 門前成市를 이루었고, 얼마 안 되어 큰 富者가 되었다.
그者는 하찮은 벼슬아치보다는 致富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으니, 大院君보다 한술 더 뜨는 弄奸꾼이었다.
🍎 李莞之密
(李莞의 熾密함을 이르는 말로, 朝鮮 孝宗 때 訓鍊大將 李莞에게서 由來했다. 맡은 所任을 周到綿密하게 處理하는 境遇를 말한다)
● 國朝人物考. 古今淸談에.
朝鮮 第16代 仁祖 (1595~1649) 때 李适의 亂을 平定했던 武臣 李莞 (1579~1627)은 京畿道 驪州에서 李守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李舜臣의 조카로서 將軍을 補弼했는데, 李舜臣 將軍이 露梁海戰에서 戰死하자 그 事實을 알리지 않고 督戰하여 勝利를 거두게 했다. 丁卯胡亂 때에는 鴨綠江을 건너 싸웠으나 衆寡不敵으로 敗하자 兵器庫에 불을 지른 後 뛰어들어 焚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장난이 甚해 보는 이들의 가슴 졸이게 했다.
그가 일곱 살 때,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볼일이 있어 出他하고 큰 舍廊이 비게 되었다. 莞이는 넓고 깨끗한 壯版防에서 혼자 놀다가 벼룩을 發見했다. 그는 벼룩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면서 송곳으로 내리 찔렀다. 霎時間에 房바닥이 송곳 자국으로 벌집이 되었다.
마침 廳지기가 들어와 그 光景을 보고 깜짝 놀라 말렸다.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면 꾸지람을 들을 줄 모르시오?”
그러나 莞이는 송곳을 뺏어들더니 아랫목 벽에 달라붙은 벼룩을 힘껏 내리 찔렀다. 그때 아버지가 外出에서 돌아왔다. 廳지기는 넙죽 엎드려 벌벌 떨며 告했다.
“애기 도련님이 송곳으로 벼룩을 잡느라고 壯版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 잡기는 했느냐?”
“네! 잡았습니다.”
“그럼 됐다. 사내는 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해내는 그런 氣魄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러고는 아들의 머리를 한 番 쓰다듬어 줄 뿐 망가진 壯版에 對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李莞의 집 大門 밖에는 조그마한 대장間이 있었다. 그곳의 대장장이는 主로 말편자나 징을 만들었는데, 편자를 만들면 땅바닥에 획 던져두었다가 다 식은 後에 모아서 木槨에 담았다. 李莞은 가끔 밖에서 그 편자를 만지작거리면서 놀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대장장이는 大家집 도련님이라 만지고 장난을 쳐도 그러지 말라고 惹端을 칠 수가 없어 그냥 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無心코 李莞을 보니 편자 한 個를 집어 얼른 바지 속 사타구니에 끼고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그랬다.
대장장이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나무라거나 빼앗았다가는 괘씸罪에 걸려 좋지 못한 일을 當할까 두려워서 慇懃히 制止할 方法을 찾았다.
다음날, 대장장이는 李莞이 나올 때쯤 되어 아직 다 식지 않은 편자를 마당에 던져두었다. 그런 다음, 李莞이 편자를 훔칠 틈을 주느라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나가 門틈으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方今 던져놓은 편자를 얼른 사타구니에 끼우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덜 식은 쇠라 뜨거운지라 그만 털썩 주저앉아서 엉덩방아를 찧더니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李莞이 큰 水蜜桃 두 個를 들고 나왔다.
대장장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그 복숭아, 저도 하나 주구려.”
“그럴까?”
李莞은 선선히 내주었다. 대장장이는 얼른 받아서 덥석 한입 물었다. 瞬間 펄쩍 뛰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에쿠! 똥이잖아. 퉤! 퉤! 퉤!”
李莞은 그제야 혀를 낼름 내밀어 약을 올리며 말했다.
“이놈! 兩班을 속였는데 그 아가리에 똥이 안 들어갈까!”
얼마 뒤, 나라에서 갑자기 全國의 대장間에 勅令을 내렸다. 말편자 다섯 섬씩을 朝廷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대장장이는 사람을 더 雇傭하여 밤낮으로 만들었지만 다섯 섬은커녕 석 섬도 만들 可望이 없었다. 그 消息을 들은 李莞은 下人을 시켜 그동안 광에 쌓아 두었던 편자들을 모두 꺼내어 대장장이에게 보냈다. 대장장이가 크게 感泣한 것은 當然했다.
歲月이 흘러 孝宗(1619~1659) 때였다. 李莞은 國防을 責任지는 訓鍊大將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모처럼 집에서 마음을 놓고 자고 있는데 緊急한 일이 있으니 卽刻 入闕하라는 勅令이 내렸다.
그런데 깊은 밤中에 부르시는 것이 아무래도 尋常치 않았다. 그래서 朝服 속에다 甲옷을 감춰 입고 나섰다. 大闕門을 막 들어서는데 一時에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영문을 모르고 遑遑한 걸음으로 御殿에 들어서니 孝宗이 말했다.
“허!허!허! 참, 壯하오. 將帥는 언제나 周密하여야 하는데 果然 李 大將은 빈틈이 없구려. 내 李 大將의 마음 姿勢를 한 番 試驗코저 함이었소.”
暫時 談笑를 나눈 뒤 退廳하려 하자 孝宗은 黃毛大筆한 자루를 下賜하였다.
李莞이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임금이 大筆을 준 데에는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칼로 붓대를 쪼개어 보니 돌돌 말린 종이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今日 寅時에 大將麾下의 軍을 引率하고 南大門으로 入城하여 三門을 두드려라.’
“城樓에 쌓여 굳게 닫힌 南大門을 어떻게 進入할꼬?”
걱정이 앞선 李莞은 暫時 생각하다가 軍士들에게 자루를 하나씩 가지고 노들나루에 가서 모래를 담아 南大門 城壁에다 기대어 쌓게 하였다.
그러고는 날이 밝기 前에 軍士들을 이끌고 南大門 城壁을 넘어 大闕로 進入하였다.
“上監媽媽. 只今 訓鍊大將 李莞이 軍士를 몰아 闕門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報告를 받고 뛰쳐나온 孝宗은 李莞을 불러 勞苦를 致賀하고 돌아가게 했다.
亦是 孝宗은 國家安衛를 責任진 大將으로서의 周密함을 試驗했던 것이다.
🍎 泥田鬪狗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말로, 서로 헐뜯거나 다투는 것을 이른다. 元來는 咸鏡道 사람의 强靭한 性格을 評한 말이었다)
● 大東奇聞에.
朝鮮의 太祖가 功臣 鄭道傳 (1337~1398))에게 八道 사람들의 性格을 한 句節로 評하여 보라고 했다. 그러자 鄭道傳은
(1) 京畿道는 鏡中美人
(2) 忠淸道는 淸風明月
(3) 全羅道는 風前細流
(4) 慶尙道는 松竹大節
(5) 江原道는 巖下老佛
(6) 黃海道는 春波投石
(7) 平安道는 山林猛虎라 對答했다.
그러나 太祖의 出身地인 咸鏡道에 對해서는 敢히 評을 내리지 못했다. 太祖가 어떤 말이라도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鄭道傳은 이렇게 말했다.
(8) “咸鏡道는 泥田鬪狗입니다.”
그러자 太祖의 얼굴이 今方 벌개지니 눈치를 챈 鄭道傳은 곧 말을 고쳐 對答했다.
“咸鏡道는 또한 石田耕牛이기도 하옵니다.”
그제야 太祖의 얼굴빛이 밝아지면서 厚한 賞을 내렸다.
朝鮮 後期의 地理學者 李重煥 (1690~1752)은 自身의 著書 擇里志에서 우리나라 八道에 對한 位置와 그 歷史的 背景 等을 廣範位하게 論하였다. 이 冊은 八道總論과 卜居總論 두 部分으로 나뉘어져 있다.
八道總論에서는 全國을 八道로 나누어 그 地理를 論하고, 各 地方의 地域性을 出身 人物과 結付시켜서 밝혔다. 그리고 卜居總論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擇하여 그 立地條件의 妥當性을 說明하였다.
八道總論은 地方誌에 該當하고, 卜居總論은 人文地理의 總說에 該當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立地條件으로서 地와 生利, 人心, 山水 等 네 가지를 들었으며, 또 可居地類와 避病地, 福地, 隱遁地, 一時遊覽地 等으로 分類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各 地方마다의 別稱은 아래와 같다.
(1) 京畿에는 道字를 붙이지 않는 것이 原則이어서 別稱이 없고
(2) 嶺南은 慶尙道로서 鳥嶺과 竹嶺의 南쪽을 말한다.
(3) 湖西는 忠淸道인데, 忠北 堤川 義林池湖의 西쪽이라는 뜻이다.
(4) 湖南은 全羅道인데, 全北 金堤 碧骨堤湖의 南쪽이라는 뜻이다.
(5) 嶺東, 또는 關東은 大關嶺 東쪽이라는 뜻이고,
(6) 海西는 平安道로 鐵嶺關의 西쪽이라는 말이다.
(7) 黃海道를 海西 (京畿海의 西쪽이라는 뜻
(8) 咸鏡道를 關北 (鐵嶺關의 北쪽이라는 뜻.
泥田鬪狗란 成語는 鄭道傳 自身이 創作한 말이 아니고 以前부터 八道 사람들의 特性을 그렇게 評加하던 말 中에 들어 있던 것이다. 只今은 이 말이 아주 막돼먹은 싸움질이나 난장판을 比喩하지만 原來는 사람의 性格을 評加한 말이었다.
🍎 理主氣從
(理가 主를 이루고, 氣가 補完한다는 뜻이다. 性理學의 理氣二元論에서 由來하였다)
● 禪門拈頌에.
儒學에서 이 世上의 모든 存在는 理와 氣의 두 要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主張한다.
여기서의 理는 宇宙 萬物의 存在 權利를 말하고, 氣는 宇宙 萬物을 構成하고 있는 根源이 되는 氣運, 卽 에너지를 말한다. 理는 形態와 作爲가 없는 無形無爲의 形而上의 存在이고, 氣는 形態와 作爲가 있는 有形有爲로 形而下의 存在를 말한다. 따라서 形而上의 理는 道로서 萬物을 生成하는 根本이요, 氣는 形而下의 器로서 萬物을 生成하는 材料다.
달리 說明하면 理와 氣는 宇宙의 根本을 이루는 太極을 말하는데, 太極은 一陰一陽으로 되어 있으며, 이 陰陽은 五行으로 이루어져 있다. 五行은 萬物化生을 뜻하는 것으로서 萬物이 낳고 成長하고 열매를 맺는 過程을 말한다.
道는 陰陽을 떠나서는 存在할 수 없으며, 그래서 一陰一陽之謂道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氣를 떠나서는 理도 存在할 수 없으며 氣 또한 理를 떠나서는 存在할 수 없는 것이 理氣說이다.
여기서 氣는 곧 性이고, 또 形質을 가지고 있으며, 그 形質은 運動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反하여 理는 形質도 없고, 運動도 하지 않으며, 다만 氣를 通해서만 把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理로 把握하지 않으면 氣의 이 같은 作用도 不可能한 것이다.
이와 같은 理氣二原論이 中心이 되어 實踐倫理를 主張하게 되었는데 朝鮮時代에는 이 性理學이 學者들에 依해 크게 提唱되었다. 性理學은 이러한 理論을 根幹으로 理를 重視하는 學派와 氣를 重視하는 學派로 分離되었으며, 여기서 理主氣從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理氣論에서 奇大升과 徐敬德과 李滉과 李珥의 理論을 보면 다음과 같다. 徐敬德은 한마디로 理와 氣는 觀念的으로는 區分할 수 있으나 具體的인 마음의 作用에 있어서는 理氣를 分離할 수 없다고 하여 理氣共發說을 主張하였다.
이에 對하여 李滉은 理氣二元論이면서도 이 優位論인 理氣互發說을 主張하였다. 이에 反하여 李珥는 같은 理氣二元論이면서도 氣發理乘途說을 主張하였는데 이러한 學說 展開가 나중에 嶺南學派와 畿湖學派로 擡頭되었다.
말하자면 李滉의 理論을 尊重하는 派는 嶺南學派로 主理論的 傾向을 보이고, 李珥를 宗師로 하는 畿湖學派는 主氣論的 傾向을 띠게 된 것이다.
한便 兩說을 取捨選擇하여 折衷式 立場을 보이는 學者들도 있었다. 그 內容을 보면 理로부터 氣를 보면 理가 主가 되고 氣로부터 理를 보면 氣가 主가 된다는 主張이었다.
🍎 已瞻新日
(이미 새로운 해를 보았다는 말로, 어떤 일을 이미 決定하여 그렇게 進行하고 있다는 뜻이다)
● 新增東國輿地勝覽에.
高麗의 武臣 康兆( ?~1010)가 第7代王 穆宗(980~1009)을 殺害하고 顯宗을 세우는 叛亂를 일으켰다. 이에 契丹의 成宗은 그를 핑계로 1010年에 40萬 軍士를 이끌고 2次 侵略을 敢行했다.
그것은 1次 侵略 때 겨우 江東 6州만을 占領하고 失敗한 것을 挽回하려는 구실이었지만 名分은 高麗의 內紛을 내세웠다.
“高麗國에서 康兆가 前 王을 죽이고 새로운 王을 세웠는데 그에 따른 大逆의 罪를 묻기 爲하여 軍士를 보내노라.”
이에 顯宗은 契丹과 平和 協商을 進行하려 했지만 失敗했다. 그러자 康兆는 이번 契丹의 侵犯은 그 源因이 自身에게 있으니 直接 나아가 싸우겠다며 海東都統使가 되어 30萬의 軍士를 거느리고 鴨綠江을 건너 興化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康兆는 檢車(一種의 裝甲車)를 創案해 겉에 많은 칼을 꽂아 敵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그 안에서 활을 쏘아 敵을 攻擊했다. 그러나 敵의 威勢가 워낙 强하여 戰勢는 漸漸 不利해져갔다.
康兆와 府使 李鉉雲이 모두 武術이 뛰어나고 씩씩한 것을 본 契丹의 成宗은 두 사람을 自己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사로잡고 먼저 康兆에게 自己의 臣下가 되라고 勸告했다. 康兆는 한 마디로 拒絶했으나 李鉉雲은 ‘이미 새 해를 보게 되었으니(已瞻新日), 이 마음 어찌 故鄕 山川을 생각하오리까?’ 하며 降伏의 뜻을 表했다.
康兆는 怒하여 李鉉雲을 발로 차면서 ‘너는 高麗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어떤 일을 잊거나 背叛한 者를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 梨太成洞
(배가 커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말로, 서울의 梨太院(梨泰院)洞 地名에서 由來했다. 무엇이든지 하나의 特色이나 長點이 있으면 그것으로 成功하거나 有名해질 수 있다는 意味로 쓰인다.)
● 韓國 地名이야기 에.
韓國의 地名 中에는 梨字가 들어가는 洞네(洞內) 이름이 많고, 또 배나무가 繁成하는 洞네는 大部分 살기 좋은 洞네이다.
서울의 梨太院도 그 中의 하나다.
梨太院은 배나무가 많고, 그 열매도 유난히 크고, 貪스러워 클 太字를 써서 梨太院이라 했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가슴 아픈 事緣이 담겨 있기도 하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數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全 國土가 焦土化되고 갖가지 文化財와 아름다운 錦繡江山이 불길에 휩싸였다.
當時 梨太院에는 雲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數十 名의 女僧들이 修道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倭兵들이 서울에 入城하여 그곳을 本據地로 삼게 되자 女僧들에게 큰 受難이 일어나기 始作했다. 修道하는 스님에게 無道한 日本 兵士들이 밥을 짓게 하는가 하면 아예 籠絡까지 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戰爭 통에 被害를 본 女僧은 한둘이 아니었다. 特히 女子이기에 겪는 苦痛은 말할 수 없이 컸다.
平和롭던 마을 梨太院에 불어 닥친 倭亂의 회오리는 너무나 큰 傷處를 남겼다. 그러다가 李舜臣 將軍이 海戰에서 連戰連勝을 거두자 海路가 끊긴 倭軍들이 허둥거리기 始作했다. 바로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死亡하게 되니 7年 倭亂은 끝을 맺었다.
그런데 그 日本人들이 물러간 뒤 姙娠한 女僧들이 續出했다. 時代의 悲運을 떠안은 그 女僧들 中에는 더러 自愧感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渦中이라 繼續해서 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서 彷徨했다. 이를 보다 못한 官家에서는 흙으로 움막을 지어 추위에 떠는 女僧들이 모여 살게 했다.
이런 事緣 때문에 나중에 그곳 마을 이름을 다를 異字와 아이 밸 胎字를 썼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 被害를 입은 女僧들의 處地를 담아 이른 것이었다고 한다. 只今은 옛날의 雲宗寺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程度로 發展하여 國際的인 觀光地가 되었다.
🍎 理判事判
(理判僧 佛經의 硏究와 參禪에만 全念하는 僧侶를 일컫고, 事判僧은 절의 運營 및 經理事務 等을 맡아 보던 僧侶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地境에 이르렀음을 이른다.)
● 理判事判野壇法席에.
理判事判은 理判과 事判의 合成語로서, 理判僧은 參禪, 經典, 工夫, 修行 等 佛敎의 敎理를 硏究하는 스님이고, 事判僧은 절의 財物과 살림을 맡아 管理하는 스님이다. 그러니까 理判事判의 用語는 佛敎 組織의 核心用語다.
朝鮮末의 學者 李能和는 그의 著書 朝鮮佛敎通史의 下篇 理判事判寺刹內情에서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朝鮮의 寺刹에는 理判僧과 事判僧의 두 種類의 僧侶가 있다. 理判僧은 參禪하고, 經典을 講論하며, 修行하고 弘法 布敎하는 스님이다. 俗稱 工夫僧이라고도 한다.
事判僧은 生産에 從事하고, 절을 管理하거나 事務 行政을 꾸려 나가는 스님들로, 俗稱 山林僧이라고도 한다.
山林이란 절의 모든 事務와 財産 管理를 通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寺刹 內에서 하는 役割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었던 것이 차츰 敎區가 擴張되고 寺刹마다 住持가 責任者로 定着되면서 理判 스님과 事判 스님 사이에 妙한 問題가 일어났다. 理判 스님과 事判 스님 中에 누가 住持가 되는가에 따라 雲水僧과 住持 사이에 密度가 달랐던 것이다. 卽 理判僧인지 事判僧인지 出身에 따라 흐르는 氣流가 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山寺를 찾을 때는 그 절의 住持가 理判僧 出身인지 事判僧 出身인지 알아야 處身하는데 壅索하지 않았다.
事實 理判과 事判 그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相互關係를 갖고 있다. 理判僧이 없으면 부처님의 智慧 光明이 이어질 수 없고, 事判僧이 없으면 伽藍이 存續할 수 없다. 그래서 淸虛, 浮休, 碧巖, 百谷 스님 等 大師들은 理判과 事判을 兼했다.
그러나 朝鮮時代 斥佛이 高調되자 나중에는 理判僧이나 事判僧이나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身分 階層이 된다는 것을 意味했다. 朝鮮이 佛敎를 排斥하고 儒敎를 國敎로 세우면서 스님은 城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禁止되었다. 때문에 理判이 되었건 事判이 되었건 스님이 되는 것은 마지막이 되는 것을 意味했다. 그래서 서로 믿고 依支할 수밖에 없는 處地에 놓이게 되었다. 崇儒排佛 政策으로 人間待接 받기가 힘들었던 時代였는데 그래서 理判, 事判은 마지막 끝場을 意味하는 뜻으로 變質되고 只今과 같은 말로 傳해졌다.
🍎 扨睾得權
(스스로 去勢를 하여 權勢를 얻는다는 말로, 어떤 目的을 이루기 爲해 自己의 重要한 權利를 抛棄하는 것을 이른다.)
● 高麗史節要, 國史大辭典에.
高麗 第25代 忠烈王(1236~1308)은 1271年度에 元나라 公主 홀도로게리 迷失公主(齊國大長公主)와 結婚하므로 말미암아 高麗는 鮒馬國, 卽 元나라의 사위 나라가 되었다.
그 後 蒙古風의 服裝을 하고 머리를 따 내리는가 하면 머리에 色色의 致裝과 족두리를 썼으며, 臙脂를 使用하고 粧刀를 지니게 되었다. 生菜로 쌈을 먹고, 두루마기를 입기 始作했으며, 高麗餠이라는 蒙古式 菓子를 만들어 먹었다.
元에서 朱子家禮의 冊이 들어오고 西方 사라센의 文化가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變化의 中心에서 宦官 崔世延이 크게 得勢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덩달아 宦官이 되고자 스스로 去勢를 하는 風景이 일었다.
崔世延은 처음부터 宦官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妬忌가 甚해서 그 女에게서 벗어나고자 去勢를 하였다. 그런데 王과 齊國大長公主에게 寵愛를 받던 宦官 陶成器의 勢道를 보자 그에게 가까이하여 宦官이 되었다.
忠烈王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齊國公主는 元나라 第5代 世祖의 딸이었다. 16歲의 나이에 40이 된 忠烈王과 婚姻하여 宮中을 監督하는 것은 勿論 政治에도 關與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崔世延에 對한 王의 寵愛가 陶成器를 凌駕하자, 두 사람은 將軍의 班列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崔世延은 王의 寵愛를 믿고 權勢를 부려 賂物을 모으고 朝廷의 人事에도 關與하여 昇進, 罷職, 逐出을 自己 뜻대로 行使했다. 그런데도 宗室이나 宰相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또 宮人 無比와 結託하여 마음껏 橫暴를 부렸다.
바로 그 中心에 齊國公主가 있었다.
齊國公主의 蒙古 이름은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였는데 後繼者 忠宣王(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를 낳으므로 大臣들의 祝賀 問安을 받았다.
나중에 齊國公主가 죽자 忠宣王은 어머니가 病을 얻은 것은 妬忌에 依한 것이라면서 無比와 陶成器 等을 함께 斬刑했다.
當時에 스스로 去勢하는 사람이 많이 나온 것은 國境이 그 만큼 어지러웠음을 보여 주는 例가 될 것이다.
🍎 人事隨心
(사람의 일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 卽 사람의 생각에 따라 일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구르는 數 만큼 살 수 있다는 三年고개에 얽힌 故事에서 由來했다)
● 어린이 說話集에.
귀가 刀子廛 卽 ‘마루구멍이다’는 俗談은, 배운 것은 없으나 귀로 들어서 많이 안다는 뜻이다. 배운 것이 없어도 귀로 들어 알고 있으니 귀야말로 보배라는 말이 刀子廛이라는 意味다.
그런데 들은 이야기가 藥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害가 될 수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의 말을 잘 믿는 老人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場에 갔다 오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드러누워 버렸다. 아내가 걱정이 되어 그 理由를 묻자 죽어가는 목소리로 變했다.
“큰일 났소. 나는 이제 三 年밖에 더 못 살게 되었소. 場에서 오는 길에 三年고개에서 넘어지고 말았단 말이오.”
그 마을 入口에는 그곳에서 넘어지면 三 年밖에 못 산다는 ‘三年고개’라는 재가 있었다. 아내는 그 말을 듣자 痛哭을 하였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을꼬? 當身이 三 年밖에 못 살면 나는 어린 子息들과 어떻게 살라고…….”
어머니가 痛哭을 하자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었다. 老人은 너무 근심을 한 나머지 끝내 病이 나버렸다. 아무리 좋은 藥을 쓰고, 용한 醫員을 불러와도 所用이 없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사는 한 靑年이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痛哭소릴 듣고 들어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初喪이 난 것도 아닌데…….”
“어쩌면 좋은가? 내가 잘못해서 場에서 돌아오는 길에 三 年고개에서 넘어졌다네, 귀에 싹이 나도록 들어온 그 三 年고개에서 넘어졌으니 이제 三 年밖에 더 못 살게 된 것이 서러워 그러지 뭔가!”
“아니,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러십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나으셔서 앞으로 몇 十 年을 더 사실 테니…….”
靑年의 말에 老人은 귀가 번쩍 띄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예.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아주 쉬워요.”
“어떻게 하는 건데?”
“三 年고개에 가서 몇 番만 더 넘어지시면 됩니다.”
“예끼 이 사람! 그러면 그 자리에서 卽死하고 말 텐데?”
老人은 火를 벌컥 내며 當場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靑年은 아랑곳없이 沈着하게 말했다.
“三 年고개에서 넘어지셨으니 三 年밖에 못 사신다고 하셨지요?”
“그래.”
“그러면 또 한 番을 넘어지시면 六 年을 사실 것 아닙니까? 그리고 세 番 넘어지시면 九 年, 네 番 넘어지시면 十二 年…….”
“가만 있자,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叮嚀 그렇구나!”
老人은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三 年고개로 올라가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목청껏 외쳤다.
“山神靈님! 제가 구르는 숫자의 세 倍만큼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어디선가 對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암 그렇게 하고말고! 十八萬 年이나 산 저 三千甲子 東方朔이 보다도 더 오래 살게 해주마!”
老人은 기쁜 마음으로 몇 番이고 굴러 내렸다.
목소리의 主人公은 바로 그 靑年이었다.
🍎 人蔘宰相
(人蔘을 주고 오른 宰相이란 말로, 宣祖 때의 尙宮 金介屎에게서 由來했다. 腐敗한 官吏를 比喩하여 쓴다.)
● 大東奇聞, 光海君 日記에.
朝鮮 第14代 宣祖 때의 尙宮 金介屎 (俗名 개똥이 ?~1623)는 世子 光海君이 宣祖의 미움을 받는 것을 奇貨로 光海群에게 阿附하여 그의 사랑을 獨차지 했다. 그래서 一個 尙宮임에도 不拘하고 權臣 李爾瞻과 雙壁을 이룰 程度로 權力이 莫强했다.
金介屎와 李爾瞻은 서로 다투어 가며 賣官賣職을 일삼아 國政을 어지럽게 했다. 보다 못한 尹善道, 李洄 等이 이를 바로잡고자 上疏를 올렸다가 도리어 流配를 當하기도 했다. 이렇게 混濁한 틈을 利用하여 韓孝純이란 者가 그女에게 人蔘을 賂物로 바쳐 宰相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韓孝純을 人蔘宰相이라고 불렀다. 또 李沖은 稀貴한 菜蔬를 上納하여 戶曹判書가 되니, 그에게는 雜菜判書라는 別號를 붙여주며 비웃었다.
🍎 因貝空村
(조개 때문에 마을이 비다. 高麗 때 한 마을 사람들이 고을 守令에게 賂物로 바칠 조개를 잡기 爲해서 모두 바다로 나가는 바람에 마을이 텅텅 비었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좋지 않은 일로 荒唐한 結果가 招來되었을 때를 比喩하여 쓰인다.)
● 高麗史節要에.
高麗 第23代 高宗 때 庾碩(?~1250)은 여러 道의 按察使를 歷任하면서 가는 곳마다 名官이라는 稱頌을 듣고, 治積도 많았다. 그는 貪官과 함께 일하기가 싫어 山城을 築造하라는 御命을 받고도 선비들과 함께 詩를 읊으며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貪官 崔怡가 나서서 그를 귀양 보냈다.
그가 귀양지로 떠나는 날, 온 고을 百姓들이 나와 哀痛해했다.
“하늘이여! 庾公 같은 名官이 무슨 罪가 있다고 귀양입니까? 公을 보내버리면 우리 百姓은 누구를 依支해 살라는 것입니까?”
이처럼 百姓들의 懇請이 드높자 곧바로 免罪되어 다시 東北面 兵馬使로 起用되었다.
그곳에는 惡弊가 하나 있었다. 江瑤珠. (바다조개)를 잡아 그 곳의 按察使 崔怡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그 時初는 어느 阿附꾼 兵馬使가 한 짓이었는데 어느새 慣例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庾碩이 그곳에 赴任해왔을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江瑤珠를 잡아다 바치는데 시달려 結局 다른 곳으로 移住하고 마을이 거의 비어 있었다.
庾碩은 卽時 江瑤珠 採取 禁止令을 내렸다. 그러자 얼마 後 移住했던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當時 地方의 守令들은 中央의 權力者에게 阿附하느라고 自己 고을의 特産物을 競爭的으로 바치고 있었다. 이런 阿諂꾼들 틈에서 庾碩이 江瑤珠 採取 禁止 公文을 내리니 어느 한 守令이 그것을 崔怡에게 告해바쳤다.
“고얀 놈! 自己가 안 바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까지 못하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는 못마땅해 했으나 庾碩이 워낙 淸廉潔白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外에도 奴婢 問題로 誣告를 받아 地方으로 左遷되는 等 受難을 격기도 했지만 그의 氣槪는 꺾이지 않았다.
🍎 一步可闚
(千 里길을 갈 사람은 첫걸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 佛敎大辭典, 三國遺事에.
新羅 第30代 文武王 때 光德과 嚴莊 두 沙門(스님)이 서로 親한 사이여서 約束을 했다.
“極樂으로 먼저 가는 사람은 반드시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그 길을 알려주기로 하자.”
그러고 나서 光德은 芬皇寺 西쪽 마을에 숨어 살며 미투리(짚신)를 삼아 市場에 팔아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便 嚴莊은 南岳에 庵子를 짓고 火田을 일구며 살았다.
어느 날, 해가 붉은 빛을 드리우고 고요히 저물어 가는데, 嚴莊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나 먼저 西方으로 가네, 자네도 빠른 時日 내에 오게나.”
놀란 嚴莊이 門을 열고 살펴보니 멀리 구름 위에서 音樂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뻗쳐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光德의 집을 찾아가 보니 그가 죽어 있었다. 嚴莊은 光德의 아내와 함께 葬事를 지내주고 나서, 光德의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男便이 죽고 없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願하신다면 그러하겠습니다.”
嚴莊은 自己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光德 아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되어 嚴莊이 光德의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자 光德의 아내가 말했다.
“스님께서 快樂을 求하면서 西方淨土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求하는 것과 같습니다.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嚴莊은 同居를 許諾한 光德의 아내가 뜻밖의 말을 하자 깜짝 놀라 물었다.
“親舊 光德도 當身과 함께 살았는데도 極樂에 갔는데 무에 그러시오?”
그러자 光德의 아내가 말했다.
“그분과 나는 10如 年이나 同居했지만, 한 番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밤마다 몸을 端正히 하고 한결같이 阿彌陀佛의 이름을 외우거나 十六觀을 지으며 달빛이 窓門으로 들어오면 그 빛 위에서 跏趺坐를 틀고 앉아 迷惑을 達觀하는 禪에 드시곤 했지요. 그러하니 그가 西方世界로 간 것은 當然한 일입니다. 모든 일은 始作부터 알아본다는 一步可闚라, 千 里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제가 보기에 스님은 東쪽으로는 갈 수 있겠으나 西쪽으로는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嚴莊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와 곧 元曉法師에게 가서 往生의 要諦를 懇切히 물었다. 元曉는 그에게 淨管法을 가르쳐 주었다. 嚴莊은 自己 잘못을 뉘우치며 至誠으로 道를 닦아 그 亦是 西方世界로 갔다.
光德위 아내는 겉으로는 芬皇寺의 奴婢였으나 事實은 觀音菩薩의 19應身 가운데 하나였다.
光德이 生前에 詩를 지어 읊으니 그 內容은 이러했다.
달님이시여!
이제 西方까지 가시었으니
無量壽佛前에 낱낱이 사뢰소서.
誓願 깊으신 尊을 우러러 두 손 모아 비오니
西方淨土 極樂世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두고
四十八大願 모두 이루소서.
🍎 一善八十幸
(한 番 善行을 하면 八十 살까지 幸福하다. 朝鮮 肅宗 때 廉喜道라는 사람으로부터 由來한 말로, 善行을 奬勵하는 말이다.)
● 大東奇聞에.
朝鮮 第19代 肅宗 때 領議政 許積 (1610~1680)은 南人의 한사람으로 朞年說(趙大妃에 對한 喪禮인 服喪問題)을 主張하여 領議政이 되었으며, 經濟의 圓滑한 流通을 爲해 常平通寶를 鑄造했다.
許積에게는 門客으로 드나들던 廉喜道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性品이 眞實하고 곧아 不義를 보면 容納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에 맞지 않으면 누구라 해도 거침없이 直諫했다.
廉喜道는 許 政丞으로부터 두터운 信賴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事緣이 있었다.
어느 날, 廉喜道가 길을 가다가 보따리를 하나 주었는데 그 속에 銀 2百30兩이라는 큰돈이 들어 있었다.
“어쩌다 이 많은 돈을 잃어버렸을까?”
그는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돈의 主人을 찾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便, 兵曹判書 金錫胄의 집에서는 말 값으로 因해 큰 騷動이 벌어졌다. 下人이 말을 판 값을 받아 가지고 오다가 그 돈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下人은 府院君 집에서 말 값 2百 兩 外에 말을 잘 길들여 주었다면서 수고費로 준 30兩을 더 얹어 받은 다음 그 집에서 待接하는 술을 한 盞 마시고 出發했다. 그런데 그 술이 禍根이었다. 오는 途中에 그만 길옆 나무 그늘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해가 질 녘에야 일어나 부리나케 오다가 돈 보따리를 찾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오긴 했으나 巨金을 잃어버렸으니 오금을 못 펴고 處分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金 判書는 必是 下人 놈이 노름을 하여 돈을 잃어버리고서 둘러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物故를 칠 酌定이었다.
그때 廉喜道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大監마님! 或是 이 돈이 大監님 宅 돈이 아닌지요?”
金 判書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紛失된 돈이 아니냐? 어떻게 해서 네가 갖게 되었느냐?”
廉喜道는 돈을 주운 經緯를 說明하였다.
“네 姓이 무엇이냐?”
“姓은 廉哥이고, 이름은 喜道입니다.”
“허허, 네 姓이 廉哥라서 그런지 넌 참으로 廉潔하구나. 길에서 橫財한 돈을 主人에게 돌려주려고 예까지 찾아오다니……. 이 돈은 네가 주운 것이니 半은 가져가도록 하라.”
廉喜道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小人이 돈에 慾心이 났다면 이렇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金 判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참으로 義人이다. 내 집에 자주 들르도록 하라.”
廉喜道가 밖으로 나오자 두 女人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 말 값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람의 어미요. 이 아이는 제 아들의 계집입니다. 어르신 德澤에 목숨을 건졌으니 恩惠가 泰山 같습니다. 素饌이라도 待接하고 싶은데 陋醜하지만 저희 집에 들러 주십시오.”
두 女人의 懇切한 請에 못 이겨 따라가니 20如 歲 된 處女와 15歲 쯤 되는 處女가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돈을 잃어버린 사람의 누이同生인데 判書 大監宅에서 飮食을 만드는 일을 하고있습니다.”
하면서 술을 따라 올렸다.
그 後 許 政丞 宅의 아들 堅이 逆謀에 緣坐되어 閉家가 되었는데, 廉喜道 亦是 그 집에 드나들던 몸인지라 獄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한 女人이 찾아와 말했다.
“예前에 뵈었던 金 判書 宅 下人의 누이同生입니다. 그처럼 善하셨던 분이 이게 웬일입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禁府에서 어르신네의 前날의 善行을 잘 아는지라 풀어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廉喜道는 그렇게 해서 풀려났다.
그 뒤, 장삿길로 들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어느 날 遇然히 한 富者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主人 女子가 나오더니 말했다.
“어른을 뵈오려고 鶴首苦待했는데 마침내 이제야 뵙게 되었습니다. 前날 말 값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람의 딸이옵니다. 어른의 河海 같은 恩德으로 아버님이 살아나신 것을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만나 뵈오면 꼭 그 恩惠를 갚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뵈오니 感慨無量하옵니다.”
廉喜道가 보아하니 옛날 술을 勸하던 그 處女가 틀림없었다.
處女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뫼실 수 있도록 許諾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洞네 사람들의 祝福을 받는 가운데 婚禮를 올렸다.
그 後 집안의 모든 살림은 아내가 맡아 다스렸고, 廉喜道는 80如 生을 厚德하게 살았다.
🍎 臨戰無退
(戰爭에 나서면 絶對로 後退하지 않는다. 新羅 花郞五戒 中의 하나로 新羅 靑少年들의 武士도 精神이었다.)
● 三國史記 列傳 第 7에.
羅.唐 聯合軍이 百濟를 侵略했을 때 百濟의 階伯(?~660) 將軍은 麾下 5千 結死隊와 함께 國運을 걸고 抗戰했다.
階伯이 兵士들에게 말했다.
“春秋戰國時代 때 越나라의 勾踐은 5千 名의 軍士를 이끌고 吳나라 夫差의 70萬 大軍을 擊破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을 本받을 때다. 모든 壯兵들은 各者가 奮發하여 싸움에 이김으로서 나라의 恩惠에 報答토록 하라.”
그리하여 黃山벌에서 5千 名의 結死隊로 新羅 軍士 5萬과 相對하여 네 차례나 分碎했다.
新羅軍 中에 左將軍 品日의 아들 官昌이 나이 16歲인데도 騎射에 能하여 副將에 任命되어 그 戰鬪에 參加하고 있었다. 統率者 品日이 官昌을 불러 말했다.
“너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意志와 氣槪가 있으므로 오늘이야말로 그러한 氣質을 보여줄 때다. 勇猛스럽게 나아가 싸우도록 하라!”
憐憫이 가득 찬 아버지의 當付를 듣고 官昌이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官昌은 곧 말을 타고 敵陣으로 쳐들어가서 敵 몇 名을 죽였으나 이내 百濟軍에게 사로잡혀 階伯 將軍에게 끌려갔다. 階伯은 그의 兜鍪(투구)를 벗겨 보고 그가 뜻밖에 少年임에 놀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官昌은 돌아와서 그냥 살아온 것을 羞恥스럽게 여겨 말했다.
“내 敵의 將帥를 죽이고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한 것이 恨스럽다. 다시 들어가 반드시 成功하고 돌아오리라.”
그는 손으로 물을 움켜지어 목을 축이고는 다시 敵陣으로 들어가서 힘껏 싸웠으나 다시 生捕되고 말았다. 이에 階伯은 할 수없이 官昌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의 鬪志를 높이 評加하여 그의 屍體를 말鞍裝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新羅軍은 少年 官昌이 싸늘한 尸體가 되어 돌아온 데 크게 刺戟되어 저마다 奮發, 勇敢히 싸웠다. 그 結果 百濟의 階伯은 戰死했다.
百濟軍은 5千의 軍士로 네 番이나 進退를 거듭한 끝에 百濟를 爲하여 壯烈하게 목숨을 바쳤다.
🍎 立志忘情
(뜻을 세웠으면 私事로운 情은 잊어야 한다. 卽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 일에 全念해야 한다는 말)
● 韓國獨立運動史에.
抗日 獨立鬪士 安重根 (1879~1910)은 黃海道 海州 出身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敎에 入門하여 新學問을 익혔다. 또 틈틈이 乘馬와 弓術을 익혀 文武를 兼備했다.
1905年 乙巳條約이 締結되자 人才養成을 爲하여 그동안 經營하던 石炭商店을 팔아 敦義學校를 세웠으나 끝내 日帝의 壓力을 이기지 못하고 滿州를 거쳐 블라디보스톡 (Владивосток)으로 亡命했다.
1908年부터는 義兵長으로 日本과 싸웠으며, 禹德淳, 曺道先, 劉東夏 等과 結議하여 1909年 10月 26日, 滿州 하얼빈(哈爾濱)에 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拳銃으로 쏘아 죽였다. 또 하얼빈 總領事 가와카미(用上俊彦)와 宮內大臣 秘書官 모리(森泰二郞), 滿州 鐵道會社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等에게 重傷을 입히고 現場에서 逮捕되었다.
그는 獨立運動 中에 나라를 잃은 異國에서 헐벗고 굶주린 데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어느 추운 겨울날 故鄕으로 向했다. 日本 官憲들의 눈을 避해야 했기 때문에 캄캄한 밤을 利用하여 겨우 집에 到着한 安重根은 어머니가 起居하는 房 앞으로가서 조용히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 줄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의 反應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房안에서는 어머니의 冷冷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내 아들은 나라의 獨立을 爲해 싸우러 나간 後 아직 그 일을 이루었다는 消息을 듣지 못했는데, 누가 나를 부른단 말이냐?”
安重根은 어머니의 斷乎한 말씀에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깨닫는바 또 한 컸다.
“그렇다. 어머님 말씀대로 大丈夫가 뜻을 세웠으면 그 일을 成功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잊고 全念해야 한다.”
安重根은 왼손의 藥指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뜻을 이루지 않고는 絶對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盟誓 끝에 伊藤博文을 射殺했던 것이다. 1910年 旅順 監獄에 收監되었다가 그해 3月 26日, 略式 裁判만 거친 뒤 바로 死刑 當했다.
그가 監獄에서 執筆한 東洋平和論은 東洋 3國이 서로 어깨를 겨루면서 平和롭게 살 수 있는 現實을 銳利하게 分析한 것으로 有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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