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태극이 국기로 사용된 것은 1883년이나 이미 수천년 전부터 민족의 신성한 부호로 사용되어져 왔으며 이는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다.
중국의 주렴계가 처음으로 태극도설을 발표한 것은 서기 1070년경으로, 1959년 12월에 국립 박물관에서 발굴한 신라시대의 감은사 석각에 새겨진 태극은 감은사 준공이 당나라 개요 2년인 만큼 서기 682년으로서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처음 발표하기보다도 388년이 앞서고 있다.
또한 고려 인종 갑자 년에 죽은 호부상서 검교태위 허재의 석관 천판 무늬 한 복판에 태극은 우리 나라에 정주 학이 들어오기 179년 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 두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태극이 우리 민족들 간에 신성한 부호로써 몇 천년 전부터 사용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극은 신라시대 임금의 왕관에서 달린 곡옥을 비롯하여, 패물, 갓집, 부채, 거문고, 배겟모, 숟가락, 떡살, 동경, 기와, 비석, 석탑 등 건축물에서 일상공예품에 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와서 민가에 까지 확산되고 있음은 태극이 하나의 문양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문양과같은 정신적인 상징어였음을 말해준다.
여기서는 이처럼 한국의 정신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극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역사적 배경과 태극이 사용된 우리 나라의 국기로써의 태극기에 대한 유래와 태극기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과 그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의 변천과정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II. 본 론
1. 태극에 대한 이론적 고찰
1) 태극의 개념
태극(太極)이라 함은 우주의 모든 물질인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역에서는 태극을 우주의 본질이며 절대적인 오직 하나의 큰 원기라고 규정했다.
모든 물질이 양(陽)과 음(陰)의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서로 대응의 위치에 있으나 태극만은 상대의 위치를 떠난 우주의 특수한 절대성(絶對性)을 가진 만물의 본질이요,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주만물의 근원이요, 모체로서 한가지 물질이나 증립자 까지도 태극이라 함이니 그것이 곧 동양철학의 근본원리인 것이다.
태극이란 어원의 최초기록은 공자의 십이습*지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태극은 동양철학에의 근본정신인 동시에 우주와 인간의 진리이며, 태극도설(太極圖說)은 태극도를 보다 쉽게 해석한 것이다.
태극(太極)의 태(太)는 양적인 체적을 의미한 大子에 一點으로서 그의 중심을 표시하여 질적인 근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극(極)은 나무(木)가 빨리(極) 커 올라간 상단을 의미하기에, ‘최고의 상단’이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이라는 全存在의 근거의 이유는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운동과 정지 등의 음?양의 기에 따라서 형성한 것이다.
시간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만유는 음양이 정(靜)과 동(動)에 의하여 서로 조화와 충돌로 유동 변화하지만, 결국 모두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여 양(陽)을 생성하고 동(動)이 지극하여 정(靜)하게 되며, 정(靜)하여 음(陰)을 생성한다. .....음양은 곧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 라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주돈이는 全存在의 근거의 이유로서 태극을 무극(無極)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극(無極)은 무의 최고(最高)를 의미하는 어휘로서 혼돈한 무물(無物)의 형상, chaos의 상태를 형용한 것이며, 유(有)의 최고인 태극은 무극과 음양의 합체로서 우주순리의 질서를 형용한 것이라면, 음과 양이 분리되어 양극이 형성된 것은 불화(不和)의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태극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공간과 시간과 존재, 극대와 극소 그리고 극중 또는 시작과 종말 그리고 진행 같은 것으로 총 집약한 우주 창조관의 극단적 표현이다.
태극의 깊은 뜻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태극이라 함은 모든 이론의 근원이며, 이(理)가 발(發)하기 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태극은 이해의 단계가 아니라 직감의 경지 라고 할 것이다.
태극에 대해서는 앞의 태극도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것을 음양이전의 이로 보든지, 음양이 함께 있는 것이라 보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만물을 생하게 하는 최초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태극의 역사적 배경
1) 태극의 기원
한국전통 문양 중의 하나인 태극과 유사한 형태의 문양은 행운을 상징하는 길조의 의미로 전 세계에서 사용되어 왔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태극은 단순한 의장의 성격으로서가 아니라 고대로부터 민족사상과 정서에 기초를 두고 생성, 발달해 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 디자인의 원형으로 현대에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태극 문양은 문양이기 이전에 태극사상으로 그 시원을 전통 사상서인 ‘천부경’이나 중국의 ‘주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이 주역에 바탕을 두고 성리학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태극사상이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고대로부터 이와 같은 사상이 있었다. 신라의 최치원이 발견하여 자신의 비문으로 남기게 했던 천부경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철학을 볼 수 있다.
한국 전통 사상의 핵심적인 경전으로 되어있는 천부경의 앞부분에는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것은 하나 즉, 전체는 없음에서 나오고 그 하나는 세 개의 극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삼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는 또한 ‘人中天地一’이라 함이 있는데 이는 ‘하늘과 땅과 사람은 하나니라,
사람은 하늘과 땅의 하나에 맞추어 삼재가 되나니 사람이 능히 그 본심의 하나를 잃지 않으면 천지만물의 근본이 나와 일체가 되므로 이른바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는 이는 이에서 얻음이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천부경의 본문을 살펴보면 그 핵심이 되는 사상은 ‘순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최적의 태극사상이 이름만 달리하여 아득한 고대로부터 우리에게 유전되어 내려져 오고 있는 것이다.
태극사상의 또다른 시원인 주역이라 함은 옛날 중국에서 기원한 학문으로서 우주의 창조에서부터 만물이 생겨나고 변화, 발전하고 쇠멸해 없어지고 또다시 생성하여 끝없이 순환하는 대 자연의 원리를 어떠한 상징과 수(數)로써 설명한 학문이다.
주역의 원리는 크게 음양이원설(陰陽二元說)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늘과 땅을 비롯한 천지만물은 음과 양에 의해 성립되고 이러한 음과 양은 상대적이면서 보완적인 작용으로 서로 유전한다는 것이다.
즉, 태초에 우주가 생겨날 때에 태극이 생기더니 이 태극이 둘로갈라져 하나는 ‘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태극에서 음, 양이 생기고 음양은 사상(四象)으로 나누어지고, 또 사상은 팔쾌(八快)로 분화된다. 이러한 역학은 태호 복의씨가 처음으로 팔쾌라는 여덟 가지의 형상을 그려서 제정한 것으로 그 뒤에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이에 해석을 붙였고 그 후 공자가 더욱 자세한 설명을 가했다.
이러한 태극론과 음양 사상이 이론적으로 집약, 정리된 것은 송대의 주렴계에 의해서 이며 그는 1070년에 태극설을 발표하였다. 주렴계가 제창한 태극도설에는 이(理)의 채용문제가 무극과 태극의 관계 즉, 無極以太極로 표현되었다.
다음으로 역시 송나라때에 조휘겸이 세상에 전했다는 天地自然地圖라는 것이 있고, 그 훨씬 두인 명나라 때에 조중전이 전했다는 古態極圖가 있다. 이 두 그림은 우리의 태극과 비슷 점이있고, 또한 중국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는 도형이다.
주돈이 이후 성리학은 정이, 주희 등 송나라 학자에 의해 발전되었고 우리 나라에들어 온 것은 고려 말기이며 서화담, 이퇴계, 이율곡에 이르러 대성하게 된다.
2)태극의 역사
태극이 우리 나라의 국기로 제정 사용된 것은 서기 1883년 1월부터 였으나 이 도형이 우리 민족의 신성한 부호로 널리 쓰여진 것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 옛날에는 이를 무슨 무늬라고 불렀는지 옛날 명칭은 참고할 길이 없고 다만 이를 태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태극도설이 발표된 뒤 정주학이 우리 나라로 유입된 때부터 시작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계로 이 도형 자체가 중국의 태극도설에서 진술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지 모르나, 중국에서 태극도설을 발표하기 수 백년 전에 우리는 이 도형을 신비의 부호로 쓰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가지 역사적인 유물로써 완전히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중국의 주렴계가 처음으로 태극도설을 발표한 것은 송나라 신종때의 우리 나라 고려 문종 24년경에 해당하며 서기로는 1070년 경이 된다. 그런데 1959년 12월에 국립박물관에서발굴한 신라시대의 감은사 석각에 새겨진 태극은 가은사 준공이 당나라 개요 2년인 만큼 서기 682년으로서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처음 발표하기 보다도 388년이 앞서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감은사의 석재에 새겨진 태극도상을 보면 신라의 왕관에 사용하던 곡옥의 형태와 같은 태극의 음과 양의 두 쪽만을 한복판에 새기고, 태극의 양쪽에는 톱날과 같은 도적의 장도형 비슷한 무늬를 새겨 넣은 특수한 수법으로 사용했다.
또, 주렴계, 소강절, 주자 등 학자들에 의하여 체계가 이루어진 이른바 정주학설이 중국에서 인정을 받아 널리 파급되고 우리 나라에 수입된 것은 고려 27대 충숙왕 1년인 서기 1314년으로서, 그 당시 원나라에 가 있던 백이정이 이를 배워 가지고 돌아온 것이 정주학설이 우리 나랑 발을 디딘 효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정주학의 도입은 서기 1314년인데 그보다도 170년을 앞선 시기 1144년, 즉 고려 인종 갑자년에 죽은 호부상서 검교태위 허재의 석관 천판 무늬 한 복판에 태극 도형이 새겨져 있음이 발견 됐다.
이상에서 입증되는 바와 같이 석각 태극은 중국의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제창하기 388년 전에 사용된 것이고, 허재의 석관에 새겨진 도형은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170년 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이 사실만 보더라도 태극이 우리 민족들 간에 몇 천년 전부터 쓰여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왕릉, 장명등, 고령, 능경등에 새겨진 태극을 보더라도 태극 주변에 8괘 그린 것은 고려말기(서기1350년경)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태극만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태극형태는 우리의 천부경에서 비롯된 신성한 부호로서 몇 천년 전부터 사용 되 왔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 뒤에 고려 말기부터 중국의 태극도설과 주자학의 도입으로 차츰 사용범위가 넓어지는데, 신라시대에 임금의 상징인 왕관의 태극의 반쪽형인 양의(兩議) 로 장식하여 신성, 신비, 위대함으로 사용되어졌던 것이 차츰 시대의 흐름과 함께 신성보다는 길상, 축복, 조화의 부호로 사용되었다.
우리 옛 유물이나 유적에서 태극도상이 나타나는 예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구체적인 모양으로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것을 경주 미추왕릉 신라고분에서 발굴되었다는 보검 장식인데 이 보검은 시나 무덤에서 발견된 것이긴 하지만 그 모양은 분명히 서역 계통의 것이며 실제로 중앙 아시아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보검에 새겨진 삼태극 도형을 분석해 볼 때 심오한 우주 철학적 관념을 느낄 수 있는데 그 구성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천상성진도(天上星辰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검의 중앙에 칼 손잡이 장식판은 장방형의 구간으로 짜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 내부에는 원이 3개 나란히 구성되어 있고 그 원 속에는 각기 3색형을 이룬 3태극 무늬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3태극 파형 무늬 속에 작은 원으로 이루어진 星辰이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아마도 삼각좌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우리 상고 시대에 국토의 신으로 여겼던 삼신(三神)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구려 무덤에서도 안에 그려 넣은 천상도 중 파상무늬를 볼 수 있는데 이 도상은 마치 선형풍을 나타낸 것과 같다.
또한 백제시대의 기와 중에 부여 규암리에서 출토된 연화와웅문전, 인동문전등의 파상 무늬도 일종의 태극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부여 부소산 성지, 공주 공산성지, 익산 미륵사지등에서 발견된 파항무늬 기와와 와당 내부에 *** 자 모양의 프로펠러처럼 회전하는 같은 파상무늬 형식은 이미 기원전 3 천년 채도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선형의 도상이 보이고 있으므로 이 형상의 의미는 이미 태고 때부터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천지창조에 대한 신앙과 어떤 신념을 기호로 표현하여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1958년 발견된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담리 용담부락의 감은사의 석재에 새겨진 태극도상을 보면 신라의 왕관에 사용하던 양의(兩議)의 형태와 같은 태극의 음과 양의 두 쪽만을 한 복판에 새기고, 태극의 양쪽에는 톱날과 같은 장방형 비슷한 무늬를 새겨 넣은 특수한 수법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의 유물인 허재 석관에서 발견된 태극은 중국의 정주학설이 우리 나라에 까지 수입되기 전에 문양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고찰에 의해 증명되었다. 태극주변에 팔괘를 그린 것은 고려말기(서기 1350년경)부터 이고 그 뒤에 이 부호의 사용은 차츰 그 범위가 넓어졌다.
역시, 고려시대 태극이 태어난 유물로 쌍용팔릉경(雙龍八?鏡)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용 두 마리가 꼬리를 쳐다보고 돌고 있는 형태와 중심에 태극 문양이 볼록하게 나타나 있다. 이 태극 무늬 주변에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상형용(四象形龍) 비슷한 무늬가있고, 특이할 만한 것은 태극 무늬가 현 태극기의 태극 무늬와 동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선시대 태조의 능인 진원릉과 태종의 능인 헌릉에서도 2태극이 보이고 있어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2태극이 주로 쓰였던 것 같다.
또한 초기 건축 양식에 가까운 창경궁 명정전의 석계에서는 동심원으로 되 2태극 무늬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태극의 모양은 진주문묘의 대성전 판문에서, 경북 원성군의 월성관 중문 서까래 마구리에서 또 서울 가희동에 소재한 백인제가의 사랑채와 안마당 쪽의 화초장의 완자무늬에서 청과 홍의 2태극 무늬가 조사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의 삼태극 무늬의 분포를 살펴보면 청덕궁 대조전월 동쪽 석게 고형석에 음각된 3태극 무늬와 돈하문 정면과 대구에 있는 문묘대성전의 정문, 진주 향교의 풍화루에 새겨진 3태극 무늬는 매우 주목되는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건축, 석조물뿐 아니라 민화, 또는 도속화, 무속화에서 그리고 가구의 장식이나, 자수, 장신구 등 민속 공예품에서 다채롭게 쓰여졌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태극은 1882년 고종 19년에 당시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 게양한 것이 그 효시로 이듬해인 1883년 국기로 제정공식 반포되었으나 그 후 여러 종류의 태극기가 혼용되다가 1948년 그 규격과 도식이 공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태극기의 기원
1). 유래 및 이름
◐ 국기제정의 역사적 배경
한국에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게된 것은 일본의 문호개방요구와 통상요구 마찰로 야기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할 당시 국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망신당한 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국기 제안, 19세기말 조선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개화독립당의 국기 제정에 관한 의지 등에서 비롯되었다.
운양호사건과 국기제정의 대두
1875년(고종12년) 8월, 일본 군함 운양호와 강화도 포대간에 발생한 포격사건을 흔히들 운양호사건이라고 말하고, 이런 연유로 일본과 체결된 조약을 병자수호조약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조선을 침공하자는 이른바 정한론이 한창 논의되고 있을 무렵인 1873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실각되자, 이때를 틈타 일본은 조선침략의 선수를 칠 수 있다는 의도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에 정박 시키고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을 삼아 조선 수비병들의 진지인 초지진까지 침투하자
이를 발견한 조선 수비병이 그런 일본군에게 총포격을 가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 수비병의 무기는 사정거리 700미터 정도밖에 나가지 못한 대포 몇 정이 전부였으나, 일본 운양호에 적재된 무기는 명중률이 정확한 신형 대포 등이었다. 이 사건에서 조선은 35명의 전사자와 많은 무기를 잃은 반면에 일본은 겨우 2명의 경상자가 생겼을 뿐이었다. 이런 막중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 강제로 병자수호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될 딱한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포격으로 인하여 군함에 게양된 일본 국기의 소실이었다.
즉, 일본 군함 운양호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하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무시한 조선 수비병이 포격을 먼저 가했다는 것은 오히려 조선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며 이 사건으로 생긴 모든 손해배상은 조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일본이 그들의 군함 운양호에 국기를 게양하였었다 라고 주장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일본은 해상을 항해하는 선박에 국기를 게양하였음은 국적을 분명히 표시한 행위로 도발이나 전쟁의 의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특히 게양된 국기에 대해서는 전쟁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훼손하거나 불태울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일본은 운양호사건 이듬해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 체결시 강화도 회담에서 일본국기를 엄연히 게양한 운양호를 어찌하여 함부로 포격했느냐 라는 문제를 회담벽두의 주요쟁점으로 끄집어냈다.
이 쟁점은 곧 조선의 입장을 아주 난처한 궁지로 몰고가는 절대적인 골치거리였고 끝내 회담의 주도권을 일본한테 넘겨주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회담에서 조선은 한마디로 국기에 대한 상식이 전무한데다가 국기를 만들지 못한 부끄러움을 깨닫고 자주독립국의 체면상으로 보아도 조속히 국기를 제정하자는 의논을 처음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국기란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조정의 지위를 나타내고 군대를 상징하는 기치만 있었는데,고려시대의 의장제도상 방위에 따라 사용된 신기, 봉황기, 해마기 등이 고작이었고,조선시대에는 용마기, 삼각기, 각단기, 천마기, 유린기 등이 있었을 뿐이다
◐ 중국의 간섭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견학할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1880년이었다. 김홍집은 미국의 통상조약 체결을 거절하고, 동시에 국제정세를 파악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일본을 건너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주일청국참찬관 황쥰센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거기에 국기 제정에 관한 제안이 적혀져 있었다.
즉,『중국의 용기를 모방하여 그려 전국에 걸도록 하라』는 국기제안과 함께 자기나라의 용기를 모방하여 전국에 게양토록 하라는 권고 내용이었다. 외국인사가 국기 제정을 권고하되 소위 종속관계를 운운하며 자기나라 국기 도형을 본떠서 전국에 게양하라니,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켜도 이만저만한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조선이 중국의 용기를 그대로 사용해서는 안되고, 다만 조선국왕의 복색문양 및 조야복색 등을 참고하여 흰바탕에 청운홍룡기를 만들어 사용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당부도 있었다.
국기 제정 문제가 자주 대두되자 조선과 靑나라는 국기 문제를 담당 할 관리를 두기로 하고 조선측에는 이응준, 중국측에는 마건충을 임명하였다. 이 두사람 사이에 조선의 국기문제가 다각적으로 검토 되었었는데, 이응준은 일본 국기와 유사한 조선측의 국기 도형을 마건충에게 건의한 바가 있었다.
이때 마건충은 우주생성의 원리를 그린 주역의 8괘를 설명하면서 반홍반흑의 태극 모양에 八道를 의미하는 8괘를 도형한 태극도형을 국기로 정하든지, 아니면,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삼각형 바탕에 황색으로 그린 용기를 모방하되 다만 색깔만을 청색으로 칠하여 국기로 사용토록 하는 등 간섭을 했었다.
◐ 개화기의 국기제정 의지
마건충의 이러한 제안은 그 동안 국기 제정으로 고심을 해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 외세의 간섭과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를 혁신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당시 개화독립당의 핵심 맴버였던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은 누구보다도 이 제안에 대하여 관심이 컸을 것이다.
그 근거로는 박영효가 1882년 9월 20일에 일본 수신사로 떠나기에 앞서 고종 황제를 방문하여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게양할 국기를 제정하였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자, 이때 고종 황제로부터 국기 도형에 대한 복안을 지시 받은 사실과, 수신사 일행을 태운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최초로 국기를 도형할 때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태극도형을 국기로 선택하였다는 점, 1897년 독립협회 서재필이가 주관이 되어 그 동안 청나라 외교사신을 맞아들이는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자주민권의 상징으로 새로이 건립한 독립문에 박영효가 도형했던 것으로 추정된 태극기를 당당하게 조각해 놓은 점들이라 하겠다.
4. 태극기의 변천 원인
국기는 오로지 한 국가에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한번 정해진 국기에 대해서는 그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다름없다. 그 까닭은 국기만이 지닐 수 있는 국내외적인 상징과 신뢰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된 지 불과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새로운 도형의 태극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점은 오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삼는 우리에게 커다란 수치를 느끼게 한 단면 중에 하나였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으리라 본다.
◐ 그리기 요령의 미비
국기의 규격과 도형은 간단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생명력이란 혼동되지 않는 역사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1883년 3월 6일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할 당시 그러한 제도적 장치를 전혀 마련하지 못했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했던 당시의 기록을 남긴 고종실록 제20권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실록 1883년 3월 6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종 황제께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8도와 네 유수도에 공문을 보내어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간청하니 쾌히 승낙하였다 라는 기록이다. 여기에서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다는 의미는 곧, 다섯달 전인 1882년 9월20일 인천항을 떠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선박 메이지마루호의 선상에 그렸다는 태극기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국기로 제정함에 있어 작도요령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런가하면,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므로써 상실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에 설치한 한국임시정부에서 조차도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또한 ??매번 회의 때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토록 하였으면서도 정작 태극기에 관한 작도요령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었다.
그러면 1942년 한국임시정부에서 제23주년 3.1절을 맞아 발표한 선언문중에서 국기와 주권 부분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한국은 1865년 처음으로 서양인의 접촉으로 충동한 이래, 1875년에는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고, 1882년 5월 22일에는 미합중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해 중국 북경정부와 통상조약을 맺고, 이어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와 사절 파견에 관한 약정을 체결하였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후로부터 61년의 시간이 흘렀다.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 주권을 표시하는 것이며 국체나 정체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3?1 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채 적의 총검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 3?1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마멸될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국 후 10년이 지나도록 해외의 한족은 농상공학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한인이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본 정부는 ①망국후 해외의 각 한한 독립운동의 정권을 계승, ②국내 31혁명의 위대한 전적과 영광을 계승하기 위하여, ③60년래의 한국 대외주권의 빛나는 사실을 계승하기 위하여, ④3천만 민족의 정기와 역량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확정, 이미 수십년 동안 국내외에서 실시하여 왔다. 원컨대 우리 동포는 충용심을 일으키고 노력을 다하여 저 위대하고 장엄한 국기를 다시금 조국에 게양할 것이며, 그 뒤로는 결코 선열의 순국 적성을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보았듯이 당시 나라를 잃어버린 우리나라의 처지에서는 국기만큼 중요한 정신적 지주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문양을 응용하여 국기로 정한 태극기에 이해가 난해하여 아쉬운 실정이다.
◐ 도형의 난해
태극기의 도형은 태극문양과 4괘로 구성되어 있다. 원 안에 옥곡(玉曲)으로 우주중에 하늘을 나타내는 양방(홍색)과 땅을 나타내는 음방(청색)으로 구분된 것이 태극문양이고, 그 주변 네 귀퉁이에 4괘를 배치하여 완성시킨 그림이 태극기이다.
그런데 태극기의 변형을 초래하게 한 원인은 바로 태극도형의 의미, 궁극적으로는 태극도형이 설득하고자하는 상징이 난해하다는 점이었다고 본다. 상징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양존하는 속성이 있어 거기에 접근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따라서, 어떤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 이해와 해설적 이해로 접근 할 수 있겠다. 추상적 이해란, 일반적인 상식이나 관념을 초월하여 미지의 무한한 창의성을 내포하고, 고도의 철학적 또는 심리학적 바탕에서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의 관념체계나 교리의 도그마(Dogma)를 거쳐서 해독될 수는 없고 다만 현실을 새로이 발견하는 가장 심오한 각자의 자아나 논리를 획득하려는 접근이라 하겠다. 이 경우는 상징의 효능은 의문의 여지도 없이 그것이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든 신비한 욕구의 구체화된 반영일 것이다. 깊고 오묘한 철학적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 할 수 있는 반면에 대다수의 통일된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해설적 이해란, 사회적인 제도나 규약에 따라 구체적 사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는 구체적이고 그럴만한 의사표시로 설득을 잘 유도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태극기에 대한 상징은 어떠한 이해로 접근을 해야되는 것일까? 견해에 따라 접근이 다르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해설적 이해라 하겠다. 왜냐하면, 태극기의 상징은 학술적 상징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통일된 공감을 주어야만 하는 객관성상징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종황제가 복안한 것을 1882년 9월 일본 방문 수신사로 떠난 박영효에 의해 메이지마루로 배안에서 그려지고, 이듬해인 1883년에 이를 국기로 제정하였음에도 그 상징을 명확하게 남겨두지 않으므로써 오히려 주역의 해석에 의존토록 방치하고 말았다.
다시 말하자면, 주역을 알지 못하면 태극기의 상징을 이해 할 수 없다라는 설명과도 같을 것이다. 주역의 원리란 워낙 무궁무진하고 범위가 방대하여 범인을 넘는 도인이 아니고서야 그 경지를 헤아릴 수 없는 독특한 동양철학이다.
그렇게 심오한 철학의 한 영역인 태극도형을 국기로 제정하였으니, 그것을 그리고자 할 때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추상적으로 변형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마땅히 국민 모두가 공감적이고 알기 쉽도록 해설적 이해로 태극 도형을 상징시켰더라면 변형의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일제탄압과 태극기 변형
한일수호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한국에서 흔적된 것은 일본의 탄압뿐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국토며, 생활문화며, 언어며, 역사 등 그 어떤 대상도 가리지 않고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태극기의 탄압은 더욱 심했다. 왜냐하면, 태극기는 한국의 국민들이 최후로 의지 할 수 있고 일어설 수 있는 신앙이자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결의를 계기로 태극기의 정신은 더욱 강인해졌다. 일본에 항거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은 그들의 총 칼에 목숨이 끊기는 순간에도 가슴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태극기의 정신과 일본의 탄압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적과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좋은 사례중에 일장기말소사건을 결코 빼놓을 수 없으리라 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일본은 한국의 마라톤 선수 손기정을 그들의 국적으로 출전케하여 1등으로 우승하자 손기정 선수가 마치 일본 사람인양 자랑을 하였었는데, 이 사실을 국내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손기정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오려내고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크게 보도하였다. 국내의 신문 보도는 당연하고 공정한 것이었는데도 일본은 일장기 훼손 및 대일본제국에 대한 모독을 운운하며, 언론을 탄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받았는데,동아일보는 그 이듬해 복간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오랜 휴간 동안에 뿌리 깊은 사내 분규가 다시 일어나고 재정상태는 재기불능으로 악화되어 1937년 11월 5일로써 발행 허가의 효력이 상실되어 영영 폐간되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태극기는 한국 국민들의 가슴속에서 더욱 투철한 독립정신으로 상징되었다. 그런 반면에 태극기의 도형은 일정한 통일성을 갗추지 못한채 국내에서, 미국 지역에서, 중국 지역에서 각기 다른 도형의 태극기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태극기를 제멋대로 게양하므로써 태극기의 도형을 아주 혼란스럽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일제의 부단한 간섭과 침략으로 인하여 당하게된 역사의 단절기간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태극기는 아마도 최초의 태극기 그대로 원형을 유지해왔으리라고 여겨진다.
◐ 태극기 변형 5단계 과정
◐ 1단계 최초의 태극기
마건충이가 끈질기게 간섭한 주역의 태극도와 삼각형 용기 문양을 단호히 거절한 고종황제는 마침내 수신사 임무를 띠고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에게 나름대로 복안한 국기의 그림을 상세히 전달하였다.
이런 사실은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일본 발행)를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필자가 발견하므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그동안 잘못 전해 오던 최초의 태극기 그림을 단번에 수정시켜주고 말았다.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일본발행) 기사내용의 원문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원문>
又此
朝鮮には國旗と云べきものなきに今度支那より來りさる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번역>
「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 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 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易掛)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이 시사신보의 발견은 고종황제의 애국심과 태극기는 단연코 중국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까지도 쉽게 느길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된 셈이다. 국가 탄생이래 처음으로 국기를 만드는 역사적 시점에서 고조황제는 자신있게 태극문양을 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고조황제의 의지에 따라 1882년 9월 20일 일본에서 제공한 메이지마루호 군함을 타고 약 한달 가량 일본을 체류할 목적으로 인천항을 출발한 박영효는 쉽게 최초의 국기인 태극기를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기까지 메이지마루호 배 안에서 수차례의 연습 끝에 완성시킨 국기는 이윽고 9월 25일 고오베에 닿자 마자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의 옥상에 게양하였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손수 제작한 태극기 大.中.小중 소형을 동래부사를 통해 고종황제께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고하였다.
「新製國旗懸寓樓旗等白質而縱方長不及廣五分之二主心畵太極塡而靑紅四隔畵乾坤坎離四卦會有受命於上也」
또한 박영효가 9월 25일 부터 고오베에 체류하는 동안 기록을 담았던 <기송무처서>에 다음과 같은 사항도 빠뜨리지 않았다.
(전략)이미 각국과 더불어 통상수호한 수혜는 사절을 파귀할 때 마다 예의상 국기가 없어서는 아니된다. 그리하여 각국의 항구에서 각국의 군함을 만나게될 경우라면 (중략)....국기를 게양하여 서로 분별하는 법이요,각국의 여러가지 경축일이 있을 때에도 국기를 달아 서로 치하하는 것이며 각국 공사들이 서로 회합할 때에도 국기로써 좌석의 차례를 표시하는 법이니(중략)....이제 영국, 미국, 청나라, 일본의 각국도 모두 우리 국기를 그려갔으니 이로써 널리 천하에 포명해야될 것이다(이하 생략)」
이윽고, 1883년 3월 6일에는 박영효가 도형했던 태극기에 대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고종 황제께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8도와 네 유수도에 공문을 보내어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아뢰자 이를 승낙하게 되어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게 되었다.
◐ 2단계의 태극기 변형
태극기가 본래의 도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84년에 제작된 것이었다.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1884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그 보다는 훨씬 후에 제작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왜냐하면, 朴泳孝에 의해 완성된 최초의 태극기는 1883년에 고종 황제로부터 국기로써 승낙을 받은 것이 확실한데, 그로 부터 1년밖에 안됐는데 그 도형이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03년 11월 29일 보스톤 선데이포스트에 실린 태극도형과, 1903년도에 우리나라가 국제적십자에 가입되었음을 표시한 나라들의 국기를 그려놓은 세계적십자나무의 포스터이다.
태극기의 괘의 모양이 독특하다. 주역의 8괘중 동쪽을 의미하는 (離)를 적절히 응용하여 그려진 두줄 괘가 인상적이다. 아무튼 2단계의 변형을 가져온 태극기의 특징은 중앙에서 陰(黑)이 오른쪽으로 돌며 밖으로 원을 그리고, 陽(紅)은 왼쪽으로 돌면서 밖의 원을 그리면서 상하대칭을 하고 있다는 점과, 괘의 배치에 있어서 왼쪽 상단에 乾, 오른쪽 상단에 坎, 오른쪽 하단에 坤, 왼쪽 하단에 離를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 3단계의 태극기 변형
3단계 변형 태극기의 특징은 음방(靑)과 양방(紅)이 좌우대칭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태극기가 처음으로 그려진 것은 1900년에 프랑스에서 개최한 파리만국박람회의 특파대사로 임명받은 민영찬 에서였다. 그는 구한말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특명전권대사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서양문화에 감명을 받고 조선의 개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민영환의 동생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명성황후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의 관료로서 영어와 불어 등 외국어가 매우 능통하였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그가 임명된 것도 그러한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파리박람회 장소에 태극기를 그려 당당히 게양하였는가하면, 1902년에는 정식으로 파리 공사가 되어 그 이듬해인 1903년 1월 8일에는 대한제국을 제네바협약에 가입하는 외교업무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민영찬에 의해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던 좌우대칭 태극기는 그후 일본에 유학온 조선유학생들이 자주 그려 사용하였는데, 특히 1905년에 발행된 유학생단체 태극학회 발행『태극학보』의 표지 태극기를 빠뜨릴 수 없다. 이 표지 태극기의 특징은 태극을 꽉 애워싸고 있는듯한 4괘인데, 지금까지 그려진 괘의 위치와는 다르게 열십자(+)의 방향에 괘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극학회란 새로 유학오는 후배들에게 일본어와 기본 과목 등 예비학습을 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선유학생 중심 강습소였는데, 이것을 모태로 1905년 9월 15일 관서지방 유학생 50명은 조선유학생단체를 조직시켰다.
태극학회는『태극학보』를 발행하여 그들의 논문을 게재하였는데, 당시 일제가 침략성을 감추기 위해 내세웠던 동양평화론, 인종전쟁론, 아사아연대론 등의 기본 논리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태극학보의 표지와 같은 태극기는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일본지역에서 더 이상 그려지거나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음방과 양방의 좌우대칭 태극기는 이때부터 국내를 비롯하여 임시정부가 설치된 중국 지역에서 활발히 그려지고 사용되었다.
◐ 4단계의 태극기 변형
태극기의 4단계 변형 형태는 주로 임시정부가 설치된 중국 지역에서 그려지고 사용하였던 태극기이다. 특히, 중국 지역에서의 태극기에 대한 상징은 아주 의미심장 하였다. 그 좋은 사례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임시정부 제23주년 3.1절 선언??에서 국기와 주권을 자세히 밝힌 점이다.
거기에 ??(전략)태극기는 한국의 독립 주권을 표시하는 것이며(중략)...태극기는 3.1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중략)....또한 태극기는 마멸될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져(중략)....
해외의 한족은 농.상.공.학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의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이하 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음방과 양방의 배치는 좌우를 수평선으로 그어서 절반씩 나누어 대칭하여 그려진 도형이다. 陽(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며 밖으로 원을 그리고 있으며,陰(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밖으로 돌며 원을 그린 상하대칭 도형이다.
그러나, 4단계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독기어린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 정신과 한일투쟁의 기치가 절정에 오를 정도였던 만큼 태극기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져 해외 항일투사는 물론 국내에서도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한 숫자가 부쩍 늘었으나, 반면에 태극기의 도형이 가장 산만하게 제작되기도 하였다.
4괘는 왼쪽 상단에 이(離), 오른쪽 상단에 건(乾), 오른쪽 하단에 감(坎), 왼쪽 하단에 곤(坤)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태극기는 해방 이후 1948년 8. 15일 정부수립기념식장의 게양 태극기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도형의 태극기중 가장 명확하게 인상된 것은 괘의 위치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쓴 태극기이다.
◐ 5단계 현재의 태극기
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법률로써 공포된 한국의 국기이다. 이러한 결정이 있기까지에는 1949년 1월 7일의 국무회의에서 국기판정위원회 구성 결의, 2월 3일 문교부에서 42인의 국기제정위원을 선정, 3월 25일 국기보양회(고문 이승만 박사)가 현재의 태극도형을 국기로 제정 할 것을 제안, 이때부터 국기제정위원회에서는 무려 6개월에 걸쳐 무려 15차례의 회합을 갖는 동안 국기도형 문제를 비롯하여 4괘선택론과 8괘선택론 등을 갑론을박한 끝에 결국은 찬성 39, 반대 4로라는 표결로 현재와 같은 태극도형을 국기로 가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태극기의 모습이 국기로 가결되지 않고 현재와 같은 태극도형이 국기로 결정한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첫째, 국기를 태극도형으로 정한 것은 국기를 최초로 제정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겪게된 일본의 침략 기간 동안 자주독립과 국권을 회복하려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정신적 기둥이 곧 태극기였다는 점.
둘째, 태극도형을 결정함에 있어 주역의 태극도형인 복희선천8괘도나 문왕후천8괘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한국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의견들이었다.
셋째,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독립되어 신생국가로 태어난 마당에 조선 왕조시대 때 만들어진 태극기를 국기로 굳이 정할 필요가 있느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으나, 이점은 독립을 외치다 일본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순국선열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던 점을 감안하여 태극문양의 기를 국기로 정했다는 점.
넷째, 현재와 같은 태극문양의 기가 과연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 한반도를 대표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도 제기되었으나, 그점은 충분히 받아들여져 일단 통일이 되면 한반도 전체 국민들에게 의견을 물어 결정 짓자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국기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 원인은 태극도형의 구성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태극도형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부여와 설득이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태극기의 의미를 이해시키려는 태극과 4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극과 음양
태극 - 둥근 원을 말하며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
음방 - 색깔로는 청색. 아침 또는 희망
양방 - 색깔로는 홍색. 햇빛과 같은 존귀한 빛
㉯4괘
건(乾) - 하늘.봄.동쪽.仁 곤(坤) - 땅. 여름.서쪽.義
이(離) - 해.가을.남쪽.禮 감(坎) - 달.겨울.북쪽.지혜
즉, 천지일월에 사계절 사방향을 의미한다.
5. 역사에 나타나는 태극기
1). 독립문 태극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낸 자리에 자주민권과 자강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재필 박사 등이 주동되어 1898년에 세운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받아 설계된 것으로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아치 모양의 출입구 위쪽을 보면 전면]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쓰여져 있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獨立門'이라고 쓰여진 화강암 현판 좌우로 태극기가 조각되어 있다.
2). 근정전 계단의 태극문양
3). 만세문 태극문양
만세문은 고종이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고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20년에 세운 비각으로써 정식 명칭은 '고종즉위40년칭경 기념비'이다. 바로 이 앞에 돌기둥을 세워 만든 만세문이 있다. 원래는 경복궁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그후 충무로의 어느 일본인 집의 대문으로 사용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다 복원해 두었다. 이 만세문의 특징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두쪽의 철문 중앙에 주물로 뜬 32센티미터 크기의 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색과 붉은색이 우로 대칭 된 긴 몸통형이다.
4). 회암사지 주춧돌의 태극문양.
5). 우표속에 나타난 태극문양]
[1895년 발행 태극우표]
태극문양을 도안한 태극우표가 처음으로 발행된 것은 1895년이었고, 미국에서 인쇄해왔다. 이 우표의 값은 5푼, 1돈, 2돈 5푼, 등 4종류였으며 네 귀퉁이에 당시 이왕가의 상징 꽃이었던 오얏꽃을 그려 넣었다. 태극문양 바로 아래에는 'KOREA"라고 표 기
[해방후 첫 총선기념우표]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하나의 땅덩어리인데 무슨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는지 남과 북으로 갈라서야 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치를 이끌어갈 국회의원을 남과 북이 투표에 의해서 선출하자고 협상을 했지만 끝내는북한의 반대로 유엔의 감시하에 남한만이 선거를 하게 되었다.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가 뽑혔다. 비록남한만의 총선거이지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표를 발행했는데 그때는 나라 이름이 확정되지 않아 '조선'이라 했다.
[전쟁중에 발행한 우표]
전쟁중에도 몇 종류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북돋운데 큰 몫을 했다.
국토통일 기념 우표는 6.25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 발행되었다.
III. 결 론
태극은 우리 나라의 국기로 사용되기 이전부터 신성한 부호로 사용되어져 왔다. 많은 사람들이 태극을 중국으로부터 온 문양으로 알고 있지만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발표하기 388년 전 이미 그것은 감은사 석각에서 보여지는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증거가 태극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고유의 문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극은 왕족의 왕관의 곡옷에서부터 백성에 베겟모에 사용되는 등 모든 계층이 즐겨 사용한 우리 민족의 문양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이 양(陽)과 음(陰)의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서로 대응의 위치에 있으나 태극만은 상대의 위치를 떠난 우주의 특수한 절대성(絶對性)을 가진 만물의 본질이요,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주만물의 근원이요, 모체로서 한가지 물질이나 증립자 까지도 태극이라 함이니 그것이 곧 동양철학의 근본원리인 것이다.
한국에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게된 것은 일본의 문호개방요구와 통상요구 마찰로 야기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할 당시 국기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망신당한 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국기 제안, 19세기말 조선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개화독립당의 국기 제정에 관한 의지 등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정 의지는 고종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점(그리기 요령의 미비와 도형의 난해, 일제의 탄압 등) 때문에 초기에는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로써 하나의 모습만을 가져야할 할 태극기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졌고 짧은 기간 동안 5차례가 바뀌는 등의 문제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5차례의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의 태극기가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에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의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든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 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묻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일제 36년 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현재의 태극 도안대로 국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지정된 태극기는 한 가운데 태극 도형과 4괘(건,곤,감,이)로 이루어진 태극기는 간결하면서도 대자연의 진리를 그대로 나타내고있다. 첫째, 우주의 근본인 태극이 음과 양 두가지의 힘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듯이, 우리 민족의 창조성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우리 민족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발전을 한다는 뜻이다. 셋째, 태극의 이론은 만물이 자연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데 있다.
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의 국민성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태극과 4괘가 전체적으로 음과 양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의 평등 사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극 도형의 청, 홍의 음양 곡선은 끝없는 계속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은 정신과 우리 민족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 국기에 대한 존엄성을 높이는 길이며 국기게양은 우리 국민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서 애국의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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