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reciation Room/香氣로운 音樂

同 心 草<春望詞>:봄을 기다리는 노래:펌

松雪花 2015. 5. 20. 20:34

                                   


春望詞[봄 날의 그리움]



- 薛濤[설도]-


其一


花開不同賞[화개불동상]꽃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불동비]꽃이 져도 함께 슬퍼 못하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가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꽃이 피고 또 지는 이 시절에




其二


攬草結同心[남초결동심]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그대에게 보내려 마음먹는데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그리워 타는 마음 잦아질 즈음


春鳥復哀吟[춘조부애음]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其三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꽃다운 기약은 아득만 한데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其四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翻作兩相思[번작량상사]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거울 속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春風知不知[춘풍지불지]바람아 봄바람아 너는 아느냐


‘薛濤’의 ‘봄을 기다리는 노래’라는 뜻의 이 ‘春望詞’는 시인 ‘金億’이 ‘同心草’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긴 이 시는 ‘春望詞’ 4수 가운데 제3수입니다.


                                               風花日將老: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 설도 (薛濤)에 관하여 -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가 있었다.

설도의 자는 공도(洪度) 어렸을적 부터 시,문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웠다.그녀는 명문가의  후예였는데 선조는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의 유명한 명장으로서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온다.

‘설도’(薛濤, 768-832)는 중당(中唐) 시인으로 기생입니다. 자는 ‘홍도’(洪度)로 장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촉(蜀)의 성도(成都)로 옮겼고 후에 기생이 되었습니다.

총명하고 기지가 풍부하며 시작(詩作)에 능해 ‘원진’(元稹), ‘무원형’(武元衡) 등 많은 선비들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절구(絶句)를 잘 썼으며 스스로 만든 붉은 종이에 섬세하고 감상적인 정취의 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수질이 좋은 물을 사용하여 단시를 쓰기에 안성맞춤인 소형 편지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종이가 바로 ‘설도전’(薛濤箋)이며 많은 사람에게 애용되었고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오늘날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 안에 그녀가 종이를 떴던 ‘설도정’(薛濤井)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녀에 얽힌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은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라고  전해온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합니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설도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원진은 원래,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혼약을 정했으나 배신을 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원진 스스로 쓴 당대의 유명한  소설 앵앵전(鶯鶯傳)에 실려있는데, 앵앵전은 훗날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주제가 되었고, 또  서상기는 우리나라의 춘향전(春香傳)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진은 또, 당시 절강성 소흥의  유명한 명기였던 유채춘이라는 여자를 농락하여 자살토록 한 바도  있었으며, 그러고도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출세한 인물인데 그러고도 설도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설도는 원진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국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머리도 몹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도 발명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백지(白紙)에  시를 써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색깔있는 시전(詩箋-시 한 수나 간단한 사연을 쓰는 폭이 좁은 종이)이 성행했는데 설도는 완화계의 자신의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늘 살펴보고 연구하고는, 꽃물을 넣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색종이를 만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사람들에게 보내곤 하였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몹시 청신하면서도 아름다워 설도전이라고 이름짓고 다투어 수장하려고 하여 몹시 귀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황실에서도 사들이는 진품(珍品)이 되었다고 한다.

시성(詩聖) 두보는 만년에 성도의 서쪽 교외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 살다가 죽었는데, 설도도 만년에 그 근처로 와서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菖蒲) 꽃과 대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청(淸)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 가면,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이 있으며 그녀의  시(詩)에 자주나오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생전에 500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88 수만 전해지고 있다.

 ‘설도’(薛濤)의 시적 재능이 꽃을 피워 성도의 명기(名妓)로 알려진 것은 정원(貞元) 연간(785-805) 초기에 ‘위고’(韋皐)가 서천 절도사로 부임한 뒤부터였습니다. 이때 ‘설도’는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였고, ‘위고’는 마흔 줄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위고’는 ‘설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후원자 ‘위고’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기생 시인 ‘설도’의 명성은 성도 일대만이 아니라 곧 수도 장안까지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어서 시인으로서 ‘설도’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장기는 4행시인 절구(絶句)였습니다. 그녀는 이 단시(短詩)로 뛰어난 감각과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설도’는 아주 영리한 여인이었습니다.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에 빠지는 일 없이 자신을 억제했고 그 결과 평온한 만년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시종일관 냉정함을 유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후원자 ‘위고’가 죽은 뒤 그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무려 열한 살이나 연하인 ‘원진’(元稹)과 의기투합한 적도 있었으나 사랑을 완성치는 못했습니다.

그 밖에도 당대의 유명한 문인, 관료, 처사 등 뭇 남성들이 ‘설도’의 연인이었으며 그들과의 교류는 ‘전당시’(全唐詩) 안에 수록된 여러 시인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도’가 알고 지낸 문인은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왕건(王建), 장적(張籍) 등입니다. 관료나 장수들로는 고숭문(高崇文), 단문창(段文昌), 이덕유(李德裕) 등 20여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설도’는 자제력을 발휘해서 기생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 여도사(女道士)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당대(唐代) 여류시인이자 관기(官妓)였던 설도는 본래 관료의 여식이었으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의 문사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는데 그중 열두세 살 아래였던 원진(779~831)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진이 <설도에게 보내다(기증설도寄贈薛濤)>란 시에서 ‘말솜씨가 빼어나 앵무새의 혀를 훔친듯하고, 문장은 봉황의 깃털을 나눠 얻은 듯하도다(言語巧偸鸚鵡舌, 文章分得鳳凰毛)’라고 형용했듯이 그녀는 탁월한 문장력으로 대단한 찬사와 주목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그녀는 손수 붉게 물들인 종이에 시를 써서 주곤 하였는데 이 때문에 ‘설도의 편지지(설도전薛濤箋)’란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가녀린 여인 앞에 펼쳐진 춘경(春景)은 더 이상 황홀할 수만은 없었다.

하나 둘씩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꽃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맥없이 흩날린다.

화려한 시절을 뒤로 한 쓸쓸한 낙화(洛花)의 모습은 기약 없는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는 여인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다.

이내 맘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면 되는 것을, 그와 함께 하기가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그리움을 접어두고 풀잎만 엮고 있자니 애써 눌러왔던 설움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러나, 여인은 애초부터 온전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었던 고독한 운명이었다.


將老(장로) : 장차 지려고 하다.
佳氣(가기) : 아름다운 약속. 사랑하는 임과 만날 약속을 뜻한다.
猶(유) : 오히려, 여전히.
渺渺(묘묘) : 아득한 모양.
空(공) : 한갓되이, 부질없이.
同心草(동심초) : 풀잎으로 동심결(同心結)의 매듭 모양을 엮고 있는 것이다. 동심결은 매듭의 일종 으로 영원히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종종 결혼의 납폐(納幣)를 보낼 때 이용되었다.:동심인(同心人), 동심쇄(同心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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